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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결혼은 왜 이리 긴가"

기사승인 : 2018-10-30 20:57 기자 : 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

페미니즘이 우리 문단의 중요한 흐름들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은 지도 꽤 되었다. 그러나 이 단어만큼 의미의 스펙트럼이 넓은 경우도 드물다.

영국 작가 레베카 웨스트(1892~1983)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페미니즘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다. 다만 내가 내 감정을 표현할 때 사람들이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른다는 것은 안다."

'리버럴'에서부터 '포스트모던'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수식어와 결합하더라도, 페미니즘이란 본질적으로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일인가를 성찰하는 일이다. 나아가 '오직 여성이라는 이유로' 주어지는 제약과 차별을 고발하고 바로잡으려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 문정희 시인의 시와 김원숙 화가의 그림을 묶은 페미시집 '내 몸 속의 새를 꺼내주세요'를 출간했다. [표지 사진=남궁은]


문정희(71) 시인은 일찍부터 이 흐름의 최전선에 섰던 여성 작가이다.

그가 "시아버지는 내 손을 잘라가고/ 시어미는 내 눈을 도려가고/ 시누이는 내 말을 뺏아가고/ 남편은 내 날개를/ 그리고 또 누군가 내 머리를 가지고/ 달아나서/하나씩 더 붙이고 유령이 되지" 로 시작되는 시 '유령'을 발표한 것은 지금부터 45년 전인 1973년의 일이었다.

대한민국이 가부장적 권위주의 체제에 짓눌려 신음하던 시절, 시대를 앞서가는 감수성과 용기가 없었다면 태어나기 힘든 작품이었다.

여성성과 생명은 문정희 시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열쇳말이다.

그는 "인생은 짧고 결혼은 왜 이리 긴가/ 가도 가도 벌판/ 허공은 또 왜 이리 많은가/ 새들아 대신 울어다오/ 나 깊은 울음 더 퍼내기 싫어/ 앙상한 광채로 흔들리는 갈대들아/ 하늘 향해 미친 손을 휘저어다오('연극 배우처럼')"라며 가부장제의 위선을 드러냈는가 하면,

"딸아, 미안하다/ 오늘 나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무능한 나라의 치욕과/ 적국을 향한 분노로 소리 지르다 말고/ 나는 목젖을 떨며 깊이 울어야 한다('딸아, 미안하다')"라고 종군 위안부들에게 가해진 시대의 야만과 폭력을 고발하기도 했다.

지금도 젊은 여성독자들로부터 사랑받는 그의 페미니즘 시편들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다소 진부해진 계몽의 색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커다란 울림을 준다.

시력(詩歷) 반세기를 넘긴 고희의 시인을 위해 후배 시인이자 파람북출판사 대표인 정해종(53)이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시 예순 여섯 편을 추리고, 재미화가 김원숙의 여성성을 주제로 한 그림 마흔 한점을 보태 매혹적인 책 한권을 펴냈다. 그림이 있는 시집이자, 시가 있는 화첩이기도 한 이 책의 이름은 '내 몸 속의 새를 꺼내주세요'이다.   

'여성성'과 '생명'에 대한 외경을 공유한 채 각자의 영역에서 정상의 자리에 오른 시인과 화가는 수십년간의 교류를 통해 예술적 영감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시와 그림이 아름답게 어우러지며, 치열하게 삼투하는 독창적이고 매혹적인 그림시집을 선보였다.

 

 

▲ 문정희의 시와 김원숙의 그림은 아름답게 어우러지고, 치열하게 삼투해가며 여성성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남궁은]


문정희 시인은 작가의 말에서 "여기 실린 시편들은 펜으로 쓴 것이 아니라 피로 쓴 것들"이라고 적었다.

 

김원숙 화가는 "나는 늘 그녀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긴 세월을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마치 개울물을 첨벙거리듯이 들락거리며 즐겁게 깊게 살아왔다"고 화가의 말에 썼다.

김원숙 화가는 앞서 뉴욕 학스 출판사에서 나온 문정희 시인의 시집 '윈드플라워'를 비롯해 스페인에서 나온 시집 '카르마의 바다' 표지에도 그림을 그렸다. 그는 '윈드플라워'가 맨해튼의 인문 서점인 세인트마크 북샵과,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쇼윈도에도 내걸렸을 때, "점령군처럼 환호작약했었다"고 회고한다.

1969년에 등단한 문정희 시인은 가부장적 관습을 벗어나 독립적이고 창조적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여성들의 노력을 일관되게 그려왔다. 여성성과 일상성을 기초로 한 특유의 시적 에너지와 삶에 대한 통찰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온 그는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마케도니아 테토보 세계문학 포럼에서 작품 '분수'로 '올해의 시인상'을 받았다.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남자를 위하여', '오라, 거짓 사랑아' 등 15권의 시집을 냈다.

화가 김원숙은 1953년 부산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를 다니던 중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리노이 주립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 뉴욕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1995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세계유엔후원자연맹(WFUNA)이 선정한 '올해의 후원 미술인'이 되었다. 저서로 그림에세이집 '그림 선물'과 '삶은, 그림'이 있다. 

 

 

UPI뉴스 / 윤흥식 기자 jardin@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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