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승인 : 2018-01-09 20:41 기자 : 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
- 류외향 시인
‘여행자’라는 말, 참 좋다. 여행자는 아무 나라에나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이건 나의 편견이 분명한데, 유럽이나 일본, 북미와 같이 한때 강대국으로 군림하며, 상대적으로 잘 살고 잘 나가 ‘선진국’이라는 수식어가 달리는 나라보다는 그들 강대국으로부터 지배받고 착취당하는 동안 산천이 멍들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느라 상대적으로 못 살고 후지다는 꼬리표가 따라붙는 나라에 더 잘 어울린다. 여행자는 느릿느릿 시간과 노닐 줄 알고, 순수한 자연과 낯선 문물에 거의 무조건적으로 반할 줄 알고, 그 속의 사람들을 한없이 깊고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여행자의 시간은 하루 단위가 아니라 몇 달, 혹은 몇 년의 단위로 흘러간다. 그리하여 여행자는 뜨내기손님 같은, 와서 돈 쓰고 가는 존재일 뿐인 ‘관광객’이라는 말보다 얼마나 시적인가. 관광객은 그리될 수 없지만, 여행자는 한 나라의 문화가 된다. 여행자는 유랑민이거나 적어도 유랑하는 삶을 동경하는 사람들이다.
지금 여기, 제주에도 여행자들이 많은데, 방비엥은 정말이지 득시글하다. 방비엥의 중심가는 손바닥만 한 시골 마을이라서 더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여행자들의 천국이라는 방비엥에서 우리가 목격한 사람들은 여행자라기보다 관광객에 가까웠다. 결코 시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그곳의 여행자들 대부분은 유럽의 젊은이들이었고, 최근 몇 년 사이 제주에서 부는 한 달 살이 바람이 방비엥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자리 잡은 여행자들의 트렌드였다. 그들의 휴가는 환상적으로 길고, 라오스의 물가는 더 환상적으로 싸니까 가능한 일이긴 하다. 중심가 대로변 식당에 앉아 있다 보면, 외국인 두 부류가 눈에 들어온다. 카약이나 커다란 튜브를 머리 위로 들고 다니는 비키니 입은 여자들과 웃통을 드러낸 남자들이 그 한 부류이고, 누운 자세로 기댈 수 있는 인도식 의자에 몸을 부려놓고 맥주병을 기울이며 티브이를 시청하는 남녀들이 나머지 한 부류이다. 이십 명 이상은 한꺼번에 누울 수 있는 어느 맥주집에서 본 그들 중 일부는 거의 하루 종일 그러고 있는 듯했다. 아침 먹으러 와서 봐도, 점심 먹으러 와서 봐도, 저녁 먹으러 지나면서 봐도 그곳의 풍경은 똑같았다. 그들은 여행자도 아니고 관광객도 아니고, 여행객쯤으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제주에서도 웃통 벗고 자전거 타는 외국 남자들이 볼썽사납듯이 그곳에서도 그 나라의 문화는 아랑곳없이 훌러덩훌러덩 벗고 다니는 치들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방비엥에선 그 차림이 그들의 평상복이다. 그들은 그것을 ‘자유’라고 하겠지만, 예의가 자유보다 앞선다는 것은 왜 모를까? 유럽 중에서도 프랑스 젊은이들이 유독 많이 온다고 하는데, 자신의 조국이 한때 그 나라를 식민지배했다는 역사엔 관심이 있기나 한가? 여전히 경제적 우위에 있다는 것 때문에 그 나라를 깔보고 있는 건 아닌가? 이런 불편함은 밤이 되면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절정을 맞는다. 수려한 산봉우리가 둘러싸고 있고, 마당 앞으로 맑은 강물이 흐르는 숙소에서 듣게 되는 난데없는 음악소리는 가히 충격이었다. 우리는 온 마을이 떠나갈 듯이 터져 나오는 소리의 정체를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그런 곳에 나이트클럽이라니! 첫날에는 밤새 잠을 설쳤는데, 소음에 시달려서가 아니라 그들이 라오스를 선택한 이유가 그저 값싼 관광지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들 대신 그곳의 산과 강과 사람들에게 미안해하느라 그랬다. 우리는 그 다음날, 도대체 나이트클럽이라곤 있을 것 같지 않은 그곳 어디에서 그런 소란이 터져 나오는지 알고 싶어 골목을 뒤지고 다녔다. 그리고 물가에 자리 잡은 한 건물 안에서 간밤의 그 광란의 잔해를 보았다. 매일 밤이 오길 기다리며 낮에는 그렇게 억병으로 취해 널브러져 있었다.
그 미안함 때문에 우리는 가급적 변두리를 떠돌았다. 그것이 올바른 여행자의 자세라 여겼으므로 중심가에선 식사시간 외엔 머물지 않았다. 또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곳은 상업지구였으므로 라오스다운 것은 거의 없었다. 그곳에서도 오토바이 한 대 빌려 여기저기 싸돌아 다녔다. 지도는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용도로만 썼다. 앨범을 펼쳐보니 방비엥의 산과 강, 그리고 아이들의 사진이 가득하다. 그저 눈길 닿는 곳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다 들어가 본 곳 중 학교가 있었다. 수업은 이미 끝난 듯, 선생들은 보이지 않았고, 아이들은 교실 안팎에서 놀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왔고, 사진을 찍자고 하니, 아주아주 화알짝 웃어보였다. 지금도 사진 속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막 굴러 나오는 듯하다. 마당에서 노는 아이들에게는 조그만 돌멩이 다섯 개를 주워 공기를 가르쳐 주었다. 돌 하나를 던지고 땅에 있는 돌을 줍고 같은 손으로 다시 떨어지는 돌까지 받았을 때, 돌 다섯 개를 던져 손을 뒤집어 손등에 착 얹은 다음, 다시 던져 올려 손바닥으로 모두 감싸 안았을 때, 아이들의 환호성은 맑은 밤하늘에 폭죽 터지듯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웃음이라니! 나중에 내 아이를 낳지 않았더라면 그리 환한 웃음에 대한 기억은 그 아이들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계곡에서 만난 아이들. 물안경 끼고 집에서 만듬직한 작살로 물고기 잡으러 나왔네. 아이들은 능숙한 솜씨로 고기를 잡아 보였고, 무에 그리 즐거운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원래 아이들이란 저렇지, 하고 생각하기 쉽지만, 한국의 아이들은 라오스 아이들만큼 많이 웃지는 않는 것 같다. 그 아이들처럼 직접 물고기 잡아서 반찬 해먹을 줄도 모르고, 작살을 만들 줄도 모른다. 자연에서 놀아보지 않은 아이들은 마당에 나가는 것조차 불편하다. 그러니 웃음의 총량도, 웃음의 순도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은 시골이라 해도 아이들 있는 집이 워낙 띄엄띄엄이라 학교 갔다 오면 동네에서 같이 어울려 놀 친구들이 없다. 도시에서 골목 문화가 사라지더니, 정반대의 이유로 시골마저 그렇게 된 지 오래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도시에도, 사람들이 빠져나간 시골에도 아이들이 없다. 다들 어디로 간 거지? 하루 종일 집밖에서 놀아도 걱정이 없는 곳, 하루 종일 집밖에서 놀아도 지겹지 않는 곳, 나 어릴 적 시골과 사내 어릴 적 도시는 그랬다. 불과 30년 전까진 그랬다. 라오스에서 만났던 아이들은 그렇게 자연 속에서 하나하나 보석 같이 빛났고, 그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오감이 충만해져, 저절로 아름다운 여행자의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까지 그들이 따라왔다. 비키니 입은 여자들과 웃통 벗은 남자들, 계곡 저 위에서부터 카약을 타고 내려온 그들이 아이들이 고기 잡는 그곳을 지나갔다. 엄청난 소란과 함께,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여행자에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필수 방문지는 시장이렷다. 가는 도시마다 시장을 다 돌아보았는데, 방비엥의 전통시장은 우리나라 오일장 같은 분위기이고, 대부분이 먹거리였다. 아열대와 열대기후가 공존하는 나라답게 농산물이 풍족했다. 메콩 강의 대부분이 이 나라의 북에서 남으로 길게 흐르기 때문에 민물고기도 많이 날 터인데, 그 시장에서는 물고기를 본 기억이 없다. 물고기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초집중 모드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는 사내에 대한 기억이 없으니, 그곳에 물고기가 없었다는 내 기억은 거의 정확할 것이다. 대신 희한한 먹거리들이 몇 가지 있었다. 구더기, 박쥐, 수달. 구더기는 살아서 ‘다라이’ 한 가득 정신없이 꾸물거리고 있었고, 박쥐 여러 마리는 죽은 채 줄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고, 수달 역시 시체가 된 채 세 마리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우리는 설마, 설마 하면서 그들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보고 또 보았으나, 아무리 봐도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 의외의 식재료 앞에서 적잖이 당황해했던 것 같다. 박쥐는 그렇다 치고, 우리나라에선 천연기념물인 수달이 식용으로 거래된다는 것이 놀라우면서 불쌍해 보였고, 구더기에 이르러서는 솔직히 혐오감마저 드는 것이었다. 뭐, 중국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이 정도는 귀여운 축에 속하긴 하고, 한편으론 여행자의 수준으로는 더 깊은 음식문화를 접해볼 기회가 없어 아쉽기도 했다. 저것을 과연 어떻게 해먹을까 하는 궁금증을 풀 방법이 없으니 말이다.
라오스의 전통음식은 쌀국수밖에 생각이 나질 않는다. 많은 날을 머물렀던 방비엥에서는 한국 여행자들을 위한 김치를 흔히 먹을 수 있었고, 한글로 된 메뉴판과 한국 사람들의 입맛에 맞춘 메뉴들이 있었다. 한국 사람들이 여행을 많이 가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 방비엥 중심가에 있는 여행사 사장이 한국에서 이민 간 사람인 덕분이다. 그 양반의 도움과 조언으로 여러 식당에서 칼국수, 불고기 등과 같은 음식을 김치와 함께 내놓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 나머지 많은 식당들은 서양 사람들을 위한 레스토랑이었다. 그 며칠을 서양식 한 번, 한국식 두 번 정도로 하루 식사를 해결하면서 비교적 만족스러웠는데, 지금 생각하니 왜 라오스 음식은 하나도 못 먹어봤을까 싶다. 한 나라 문화의 진수는 음식에 녹아 있는데, 구더기 요리나 수달 요리까지는 아니더라도 라오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을 구경도 못 해봤던 것이다. 작은 동네에 너무 많은 여행객들이 몰려 상업지구가 생기고, 여행객들의 취향에 맞춰 조성된 곳이 방비엥의 중심가이다 보니, 정작 라오스다운 것은 거의 없다. 물론 중심가 대로변을 벗어나면 깜짝 놀랄 만한 자연이 신기루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그 자연 때문에 그곳에 그리 많은 여행객들이 몰려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 묻지 않은 자연에 그대로 녹아들어 살아가는 라오스 사람들, 우리가 다시 라오스에 가고 싶은 이유는 그 사람들이 보고 싶기 때문이다.
방비엥을 떠나 루앙프라방으로 향했다. 동남아 여행은 사실 사원 여행이라 할 만큼 도처에 널린 것이 사원인데, 사원이나 수도원이나 성당이나 성이나 뭐 이런 것들은 내 취향이 아니다. 여행서에서 알려주는 정보가 거의 그런 것들밖에 없어 가 보긴 한다만, 별다른 감흥이 없다. 사원의 도시 루앙프라방에서는 사원보다 야시장이 더 재미있다. 여기 야시장은 먹자골목이 아니라서 더 좋다. 내 기억대로라면 먹거리는 하나도 없었던 것 같다. 수공예품, 토산품 등등 선물용으로, 장식용으로, 기념품으로 사가면 딱 좋을 것들만 있었던 것 같다. 이곳이 우리 여행의 마지막 장소라서 우리 결혼을 도와준 몇몇 분들에게 인사를 드리고자 맞춤한 선물을 고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돌고 돌고 또 돌았다. 대개 고산족들이 만든 수공예품이 많은데, 가격이 만만찮다. 바가지라면 바가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것을 수작업으로 만든 거라 생각하면 또 수긍이 가기도 하고,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야시장 판매가 그들의 주 수입원이라면 좀 바가지 같아도 못 살 것도 없다. 그런데 사내는 그 동네 사람들과 흥정하는 데 재미가 붙어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 서로 계산기 두드려가며 설왕설래하였다.
그 중에서 커다란 이불보와 베개커버 세트는 좀처럼 흥정이 성사되지 않아 두 번이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래도 사내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내가 한국에서도 그렇게 가격을 깎을 만큼 흥정의 달인도 아니다. 대개 보통 남자들이 그렇듯 달라는 대로 주고 사 버리거나 안 사고 말지, 깎아달라고 흥정하는 일은 잘 없다. 그런 사내가 라오스에서 사람들에게 푹 빠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힘든 흥정을 할 때도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왜 그 가격이어야 하는지 애타는 눈빛으로 설명하곤 했는데, 그게 이편의 구두쇠 같은 자들에게 먹히지 않아도 싫은 표정을 짓는 법이 없었다. 사내는 그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정말 돈을 깎아서 한 푼이라도 아끼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들과 달리 주고받을 언어가 없으므로 계산기 두드려가며 대화하는 게 그렇게 재미진 모양이었다. 세 번째로 다시 이불보와 베개커버를 파는 고산족 부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옥신각신하더니, 결국엔 그 부부가 원하는 금액을 주고서 샀다. 그래도 처음 가격보다는 많이 깎은 것이라 서로가 흡족한 거래를 한 셈이다.
이제 여행은 끝났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선물 몇 가지로 올 때보다 조금 더 뚱뚱해진 배낭을 하나씩 짊어 메고 비행기를 타고 캄보디아 시엠립으로 갔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려면 서너 시간을 기다려야 하기에 우리는 룰루랄라 평양랭면관으로 가서 입과 눈이 즐거운 식사시간에 흠뻑 빠져 있다가 다시 공항으로 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캄보디아 입출국 관련 법에 따르면 캄보디아로 입국한 외국인은 24시간이 지나서야 출국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행서건 인터넷이건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런 낭패가! 우리는 졸지에 캄보디아에 발이 묶일 판이었다. 그래서 예매해 둔 비행기를 못 타게 되면 그 다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일처리를 해서 한국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 생각만 해도 어질하였다. 바짓가랑이 잡고 매달려서라도 그 비행기를 타야만 했다. 그런데 우리와 똑같은 상황에 놓인 한국 사람이 두 명 더 있었다. 사십대 남자 한 명과 오십대 남자 한 명이 일행이었는데, 그 자체만으로도 우군을 얻은 듯 힘이 생겼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기댈 존재가 아니라 내가 돌봐야 할 존재였다. 우리 둘까지 합쳐 넷 중에 영어를 가장 잘 하는 사람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우먼, 맨, 맨, 우먼 하는 수준이 영어를 가장 잘 하는 사람이라니, 참으로 답답하고 황당한 노릇이었지만, 어쨌거나 그 자리에서 나서서 손짓 발짓 하고 있는 사람은 분명 나였다. 모두들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타고 갈 대한항공 직원을 불러달라고 했고, 좀 있다가 나타난 대한항공 직원도 현지 캄보디아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와 나의 영어 발음은 서로가 잘 알아들을 만큼 서툴러서 비교적 대화가 잘 되었다. 그는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딱 한 가지라고 했다. 돈이 필요하단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1인당 100달러 정도를 요구했던 것 같다. 아, 이런 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뒤통수를 쳤다. 뇌물의 세계. 나는 깨끗한 물에서만 살 줄 알았는데, 나라 밖에서 이런 일을 겪는구나 싶었다. 역시 세상은 살고 볼 일이고, 세계는 좁은 것이었다. 어쩔 도리가 없다. 집으로 가려면 울며 겨자 못 먹겠나. 와사비라도 먹어야지. 또 한 가지 조건이 더 있었다. 돈을 걷어 한 사람만 따라오라며 나를 지목했다. 순간적으로 겁이 나기도 했지만, 모두를 위해 나 한 몸 잘 해야지 하는, 웃기지도 않는 영웅주의에 살짝 우쭐했던 것도 같다. 그렇게 4인분의 뇌물을 걷어 그 직원을 따라갔다. 어느 사무실로 들어가니, 제복을 입은 한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났고, 그는 책상 위에 있는, 종이에 구멍을 나란히 두 개씩 뚫을 수 있는 펀칭기를 반만 기울여 들었다. 돈을 그 아래 집어넣으라는 뜻이었다. 나는 돈을 집어넣으면서 제복을 쳐다보며 우리 네 사람의 운명이 달린 한 마디를 내뱉었다. “플리즈!” 제복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펀칭기를 내려놓았고, 나는 대한항공 직원의 안내를 받아 일행에게 돌아갔다. 그리곤 일사천리로 출국 수속을 밟고 비행기를 탔다. 행여나 뒤에서 부를까 후다닥후다닥 우리의 몸놀림은 정말 재빨랐다. 역시 여행의 묘미는 예기치 않은 사건에서 온다. 대미를 장식해준 캄보디아 출입국관리소에 뒤늦은 고마움을 전하며, 보름 동안의 신혼여행의 막을 내린다. 여행이어서 아름다웠던 신혼은 서서히 뒤안으로 사라지는 중이다. 보따리 싸들고 마라도로 들어갈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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