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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게로 가는 멀고 힘든 길

기사승인 : 2017-11-06 20:30 기자 : 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

- 시인 류외향


책임감과 자존감. 내가 왜 마라도를 다시 들어갔으며, 팔자에도 없는 (줄 알았던) 짜장면 장사를 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어째서 내 인생의 최대 전환점이 되어 나라는 사람의 생활관은 물론이요 세계관까지 바꾸게 되었는지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저 두 단어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결혼 후 마라도행은 사내가 청혼 당시 약속했던 세 가지가 한꺼번에 뒤집어지는 결과를 낳았고, 그로부터 오랫동안 그것이 억울해서 미칠 것 같은 나날들이 이어졌음에도 나는 지금까지 그 삶의 연장선에 서 있다. 역시 지금 생각해도 억울해서 다시 상기하자면, 사내는 결혼 후 뭍으로 나오기로 했었고, 장사를 하되 혼자서 알아서 하기로 했었고, 그 장삿거리는 짜장면 따위가 아니라 당연히 횟감이었었다. 나는 그저 하던 대로 글 쓰고 살림 살면서 약간의 내조만 하면 되는 줄 알았었다. 내가 사내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내가 내 삶 속으로 들어와 둘이 평화로운 평행선을 그리며 살아갈 줄 알았었다. 그러나 매머드급으로 몰아쳐오는 인생의 소용돌이를 맞이하여, 고민과 갈등을 끝내 다 풀어내지도 못한 채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고야 말았던 것인데, 그 이전부터 나는 어떤 고비마다 결국 ‘받아들임’으로 내게 주어진 숙제를 풀어갔던 것 같다. 때로는 ‘받아들임’ 보다 ‘도망’이 훌륭한 해결책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거의 그래 본 적이 없는 듯하다.

대학시절, 건축과가 아닌 바에야 아무 과나 상관없다고 들어간 아무 과에는 발걸음도 거의 하지 않은 채 교지편집위원회에 들어가 고등학교 때부터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던, ‘데모하는 대학생’의 삶 속으로 불쑥 진입해 온통 그 정열적이고 정의롭고 사명감에 똘똘 뭉친 일상에 나를 내맡겼었다. 당시 경북대학교 복현교지편집위원회는 한강 이남의 최고 대학이라 자찬하던 경북대의 위상만큼이나 한강 이남의 운동하는 대학생들 속에서 높은 위상을 자랑하고 있었다. 적어도 선배들의 자부심은 그러했다. 나는 선배들이 온몸으로 내뿜는 불굴의 의지와 역사적 사명감이 내게도 뚝뚝 떨어지길 바랐다. 그렇게 희열에 찬 1학년을 보내고 2학년이 되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원래 새로운 교지편집위원장으로 내정된 3학년 선배가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줄행랑을 쳤다가 군에 자진 입대해 버린 것이다. 드높던 복현교편위의 위상은 아마도 내가 입학하기 전부터 무너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사람들이 뚝뚝 떨어져나갔고, 그것은 당시 학생운동이 겪던 위기와 맞물린 결과였던 것 같다. 한 명 남은 선배가 행방불명이 되자 역시 한 명밖에 남지 않은 2학년이던 내가 하는 수 없이 편집위원장 자리에 앉게 되었던 것이다.

천지 아무것도 모르던, 꼴랑 ·대학 2년차밖에 안 되던 나는 홀로 신입생을 뽑고, 홀로 신입생 교육을 하고, 더 천지 모르는 1학년들을 데리고 기획회의를 하고 원고 청탁을 하고 교정을 보고 교지를 만들었다. 당시 교지에는 한참 나이가 들어서 봐도 어려운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당최 뭘 알아서 저런 걸 기획씩이나 하고, 무슨 깜냥으로 청탁씩이나 해서 어쨌거나 모양 빠지지 않는 번듯한 교지를 만들어냈을까, 이 나이가 되어도 이해 불가다. 그렇게 3학년을 마칠 때까지 교지 2권을 만들고 공식석상에서 물러났는데, 내게 짐 지어진 역할을 하는 동안 미치도록 외롭고 힘들었어도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 시절이 내게 남긴 의미는 충분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사람들이 책임감이라는 단어로 나를 평가하기 시작했는데, 내가 언제부터 그랬는가 자문을 하다 보면 항상 교편위 생활이 떠오른다. 직장을 때려치울 때는 과감하고 신속하게, 그 외의 대부분의 일들은 그렇게 쭉 견디며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선택한 일들에 책임을 지기 위해 살다 보면 그 책임감이 곧 내 자존감이 되었고, 곧잘 사명감으로 승화되곤 했다.

결혼 후 마라도행을 결정한 것도 내 선택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고, 지금까지 짜장면을 애면글면 부여안고 살아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 아니면 안 되는 상황이거나 나라도 해야 하는 상황, 언제나 그 둘 중에 한 가지가 명분이 되었다. 그런데 또 많은 경우 그 책임감이라는 것이 실속이 없는 겉치레가 되어 발을 빼야 할 때 빼지 못하거나 도로 물려야 할 때 물리지 못하는 자승자박의 동아줄이 되곤 했다. 한 마디로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미련밤탱이가 되곤 했던 것이다. 그때 내 선택의 여지가 그것밖에 없었을까? 결혼을 했다고 해서 꼭 둘이 한 집에서 살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주말부부도 있고, 월말부부도 있는데, 무슨 대단한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호랑이굴, 아니 하이에나굴 같은 같은 섬으로 들어갔느냐 말이다,라고 한탄해본들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쏟아진 쌀이고, 버스 떠난 지 한참이다. 이렇게 한 번의 결정적 선택이 뒤따라오는 다른 모든 일들에 대한 또 하나의 책임감이 되어 평생토록 묶여 살아가는 것, 뭐 그것이 결국 인생 아닌가 말이다.

우리 둘은 공통점이 별로 없는 부부다. 그런데 과도한 정의감과 사명감에, 부족한 현실감각은 닮았다. 거기에 무대뽀 정신과 높은 이상까지 더해져서 사서 고생하면서도 절대 물리지는 못하는 성미도 닮았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이런 걸 ‘똘끼’라고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마구 든다. 남들이 이해 못하는 고집, 남들이 가지 않으려는 길을 미련밤탱이처럼 걸어가면서 곧 죽어도 자존심은 살아가지고 갖다 붙이는 의미와 명분은 하늘을 찌를 듯 충천했으니 말이다. 이런 성정이 닮은 둘이 만나지 않았더라면, 마라도에서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 해서 사내가 짜장면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박수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데, 마주칠 만한 손바닥이 누구에게나 있는 건 아니다. 내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게 “나니까 그리 했지.”다. 그 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내의 여자가 오로지 나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사내는 참 복도 많다. 그걸 모르는 건 사내밖에 없다. 요즘 들어 조금 철이 드는 것 같은데, 한 번씩 또 어깃장을 놓아서 선희 언니 시에 나오는 구절처럼 나이 칠십이나 되어야 저 인간이 마누라 불쌍한지 알겠다 싶다.

여하간 짜장면을 하겠다고 내뱉었고, 결혼도 하겠다고 내뱉었으니 그저 앞으로 진격하는 수밖에. 좀 찝찝하더라도 결정을 내리고 나면 홀가분해지는 법이다. 우리는 계획대로 결혼을 했고, 신나게 여행을 떠났다. 신혼여행지로 정한 캄보디아-라오스 코스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캄보디아는 당시엔 라오스 직항이 없어 경유지로 정한 곳인데, 가는 김에 한 나라라도 더 구경하자는 계산으로 앙코르톰과 킬링필드 두 곳을 방문했다. 킬링필드는 어차피 공부하자는 심산으로 간 곳인 만큼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앙코르…… 아, 참 난해한 곳이었다. 3일치 표를 끊었는데, 하루 만에 지칠 대로 지쳤다. 그 거대하고 수많은 돌덩이에 지친 것이다. 거기에다 저 돌덩이를 나르거나 쌓다가 골병이 들거나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정작 불상을 만들고 신전을 쌓은 사람들은 온데간데없고 무슨 무슨 왕조의 이름만 남아 공적이 어떠니 저떠니 떠받드는 것도 볼썽사나웠다. 대략 그런 불편함을 알고 오긴 왔는데, 건축물의 위대함을 느끼기는커녕 돌덩이 자체가 그렇게 사람을 짓누를지는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지친 심신을 그나마 달래준 것은 돌덩이를 감싸고 자라고 있는 신비하고 거대한 나무들이었다. 우리는 오랜 시간 그런 나무들의 군락을 보고 또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캄보디아는 굳이 다시 가고 싶지 않은 여행지인데, 그러자니 평양냉면이 걸린다. 앙코르톰이 있는 도시 시엠립에는 북한에서 직접 운영하는 평양랭면관이 있다. 캄보디아도 공산주의라 두 나라가 수교를 맺고 있어서 그런 모양인데, 우연히 발견한 평양냉면집을 그냥 지나치는 건 평양냉면에 대한 모독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노다지라도 발견한 심정으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저녁에만 문을 여는 그곳은 규모도 엄청나서 자리가 몇 백 석이 되었고, 북한 접대원들의 공연 무대까지 높고 널찍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TV에서나 보던 북한 여성들을 실제로 볼 줄이야. 그네들은 예의 그 캐주얼한 한복 차림에 단정하게 머리를 묶었고, 정말이지 한결같이 미인이었다. 나긋나긋 상냥하기도 이를 데 없었는데, 다만 한국 가이드 남자들이 그네들을 대하는 말투나 태도가 상것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어서 상당히 불쾌했다. 남한에서 여행간 단체 손님이 평냉랭면관의 주 고객인 모양으로, 그 가이드들은 그것을 이용해 한껏 위세를 부리는 듯했다.   

냉면은 참 맛났다. 냉면을 그리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많이 먹어본 편도 아니어서 구구절절이 맛이 어떻다 저떻다 평가할 깜냥은 없지만, 국내에서 먹어본 냉면 육수가 결국 조미료 맛에 붙들려 있다면, 평양냉면은 확실히 달랐다. 그때만 해도 우리의 식생활에 혁명이 오기 전이라서 세세히 구분해낼 혀도 못 되었지만, 우린 담백하면서도 깊은 육수 맛에 적잖이 반했었다. 북한에서 직접 운영한다니, 머리가 먼저 점수를 후하게 줬을 수도 있고, 접대원들의 놀랍도록 뛰어난 가무 실력에 넋이 나가 뭐든 다 맛있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우린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라오스를 갔다가 다시 시엠립으로 와야 했기 때문에 그 맛난 냉면을 한 번 더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신나 했었다. 그렇게 두 번, 냉면 외에도 몇 가지를 더 먹었는데, 메뉴는 생각나지 않지만 한 상 걸게 차려진 훌륭한 밥상이었는데다, 찬 하나하나까지 맛이 뛰어났다. 캄보디아에서 찾아낸 북한의 밥상이라니, 캄보디아를 다시 갈 일은 없을 테니, 이제 그 음식을 어디에서 맛보나. 평양냉면과 앙코르의 돌무더기 속 나무들과 킬링필드의 해골들을 기억하며, 진짜 목적지인 라오스로 넘어갔다.

내가 기획한 첫 여행을 완벽하게 해내고자 아주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준비를 했다.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최대한 싼 비행기표를 끊었고, 온갖 정보를 다 동원해 십여 일 동안 라오스를 최대한 많이 돌아볼 수 있는 여행 경로를 짰다. 국제 미아가 될지도 모르는 해외여행에서 길을 잃을까 봐 걱정도 한 보따리였기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아,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시간들이 즐겁다. 여행을 기다리며 여행을 기대하는 그 순간들, 그것이 여행지가 받쳐주지 못하면 실망감이 배가 되는데, 라오스는 그런 나의 정성과 기대를 고스란히 보답해주었다. 한국의 가을 하늘이 맑고 높고 푸르다고 했던가. 라오스를 가보라. 그곳의 하늘은 입이 쩍 벌어질 만큼 맑고 높고 푸르러 경외감이 들 정도이다. 사회주의 국가이고, 훼손되지 않은 천혜의 자연을 간직한 라오스의 사람들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캄보디아에서 육로를 통해 국경을 넘었다. 그 국경은 사람들이 별로 이용하지 않는 경로였는데, 진짜 그날 걸쳐놓은 막대기 하나가 전부인 국경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다. 시작부터 불안감이 몰려왔다. 막대기 하나가 전부인 그곳에 국경 검문소가 있다는 사실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그렇게 우리의 신혼여행은 동네를 옮겨갈 때마다 도박 같은 불안과 긴장을 깔고 있었다. 다행히 검문소 안에는 여권에 스탬프를 찍어주는 군복 입은 직원이 앉아 있었고, 우리는 휴일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특별수당에 해당하는 돈을 더 지불하고 무사히 도장을 받아 국경을 넘었다. 국경을 넘는 시간은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캄보디아에서 택시를 타고 국경까지 간 게 천만 다행이었다. 캄보디아 사람과 라오스 사람은 말이 통했다.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은 같은 언어로 대화를 했고, 막대기 저편에는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큼만 길이 뚫린, 그것도 비포장 흙길인, 열대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숲속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국경은 캄보디아와 라오스 내국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 아닌가 싶다. 외국 여행객은 그곳을 지나 마을까지 갈 수 있는 수단이 없으니까 말이다. 골라도 제대로 골랐다. 첫날부터 스릴만점의 라오스 여행이었다. 택시 기사는 우리가 걸어 저 햇빛도 잘 들지 않는 시커먼 숲속을 통과할 수 없으니, 자신이 마을까지 태워주겠노라고 아주 친절한 제안을 했고, 우리는 바짓가랑이라도 부여잡아야 할 판이라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고마워했다.

어둑해져서야 어느 마을에 도착했고, 택시 기사는 마을회관 같은 곳에 내려주고는 숙박시설을 알아봐주었다. 그러나 그 동네는 아무것도 없단다. 더 큰 마을까지 가야 하는데, 택시도 없다. 캄보디아 택시 기사는 더 이상 자신이 갈 수 없다며 돌아갔고, 우리는 라오스 사람들과 영어 단어 몇 개로 대화를 시도했다. 큰 마을까지 가는데 동네 주민의 승합차로 태워주겠다는 것까진 좋았는데, 그 비용이 어마했다. 그 나라 물가를 고려하여 우리가 낼 수 있는 최대한에서 영이 하나 더 붙었다. 종이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저들은 왜 그 정도의 비용이 정당한지, 우리는 그건 해도 너무하니 제발 대폭 깔아달라는 협상을 벌였다. 그 폭이 너무 커서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할 거라는, 그래서 라오스 첫날을 비박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해외여행에서 터무니없는 바가지를 쓰는 일은 절대 당하지 않겠다는 불굴의 자세로 임했기에 그쪽에서 대폭 양보를 하는 선에서 협상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이나 우리나 계속 웃음을 지었다. 원래 가격에서 엄청난 손해를 보면서도 그들은 한번도 얼굴을 붉히거나 화를 내거나 돌아서지 않았다.

그게 그들에게 손해라는 걸 큰 마을에 가는 동안 깨달았다. 금세 깜깜해져 볼 풍경도 사라지니, 지친 우리는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얼른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차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끝이 없을 것처럼 달리고 달렸다. 그렇게 비포장도로를 한 시간도 넘게 달려가자 우리는 그들이 요구하는 비용이 바가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 길을 다시 한 시간도 넘게 달려 외롭게 돌아가야 할 운전자까지 생각하니, 어찌나 미안하던지. 뭐 그렇다고 주머니에서 돈을 더 꺼내진 않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라오스 사람들은 그렇게 첫날부터 감동을 주었다. 자신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 외국인들에게 끝까지 친절하며, 손해를 보더라도 한뎃잠을 자게 하지 않으려고 터무니없는 요구를 흔쾌히 들어준 그들의 배려. 그것은 라오스를 떠나오는 날까지 이어졌고, 어느새 우리로 하여금 라오스 사랑이 싹트게 하였다.

원래 신혼여행에 관해서는 글을 쓸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지난 호를 쓰고 나서 사람들이 다음 호를 한껏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 마음에 쳐진 장벽을 걷어내기가 어렵다. 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났건만, 내 머리와 마음이 다시 그 섬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그렇게 정의를 위해 들어갔다 상처투성이 패잔병이 되어 도망쳐 나올 때까지 견딘 2년여의 세월, 이것을 글로 어떻게 푸나. 그래서 신혼여행글이 계획에도 없이 길어지고 있는데,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좀 더 시간을 주실 수 있나요? 그때의 강단으로 돌아갈 준비가 될 때까지 좀 더 신혼여행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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