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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야!” 일송(一松) 박성수 회장의 소나무 인생이야기

한방 대일수출 1호인 솔표 우황청심원

기사승인 : 2017-10-10 20:28 기자 : 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

1897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한 박성수님은 당대 한의학의 명가 이상열 선생 문하에서 한의학을 수학한 후 1919년 경성한약 전수학원을 졸업했다. 그리고 1920년 23세에 ‘질병으로부터 국민을 지킨다’는 일념으로 한성약업사와 대창창업사를 창설했으나, 독립운동에 가담한 이유로 9월 수감돼 1년 6개월 옥고를 치뤘다.

1925년 조선무약합자회사를 설립, 솔표 우황청심원 등 대표적인 한약제제를 개발하게 되었다.
솔표라는 상호는 박성수 회장의 아호 一松에서 따온 것이다. 지조나 의리, 불로장생의 상징물인 으뜸의 소나무가 되어 어려운 난국에 태어나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의 건강장수를 이루겠다는 염원이 함축되어 있다.

1969년 일본 후생성의 수입허가를 얻어 최초로 일본으로 수출된 의약품인 솔표 우황청심원은 당시 “일본은 1등국, 한국은 3등국”이란 인식 하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말살의 위기에 있던 한의학을 되살리고 경희대 한의대 전신인 ‘동양의전’을 설립하다.
일제시대에 가장 야만적으로 매도당했던 것이 바로 ‘한글’과 ‘한의학’이었다. 일제에 의해 말살되었던 한의학의 재건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 분이 바로 일송 박성수 회장이다. 일송은 한국 제 2호 한의학교수로 경희대 한의대 전신인 동양의전을 설립하는데 주축이 되었는데 당시 재단만 있으면 문교부 인가가 나오던 다른 대학들과는 달리 한의과 대학은 먼저 보건사회부장관의 승인이 떨어져야 했는데, 한의계에는 정치인이나 재력가도 없었고 반대세력들이 한의대 설립을 필사적으로 저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송은 당시의 오한영 보사부장관과 내무부장관, 문교부장관 등 다양한 인맥을 활용하여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던 한의대 인허를 받아냈다. 또한 51년에 제정된 국민의료법 제 2조 의료업자 종류에 한의사를 삽입, 명문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두고 일송의 정치적 수완과 강한 집념이 이룩한 대업이라고 박남중 씨 등이 일송의 능력과 노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59년 12월 한의사제도의 폐지론과 ‘의료유사업자령’이란 큰 시련이 겹쳤지만, 생사기로에 선 한의학계를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일송을 중심으로 집결된 한의계는 한의사의 법적 지위가 확보된 신의료법안을 통과시킨다. 이로써 한의학제도권이 안전하게 정착되는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한의사회장을 역임했던 최규만은 일송(一松)을 회상하면서 ‘검정시험제도’로 후진을 많이 배출시켰고 의료단체 중 최초로 정관도 만들고 협회활동의 활성화를 이룩하였으며 한의사회 운영에 자신의 사비도 많이 들였다고 기록하였다.

김남일 경희대 한의학대학장은 “한의사 출신의 독립운동가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밝히면서 “1919년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된 바 있는 박성수 대한한의사협회 명예회장과 노병의 선생 같은 분들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평가가 필요하다”면서 한의계의 근대화 과정에서 생겨난 부작용과 잘못된 시각의 문제점을 해결하여야만 한의학의 앞날이 있다고 강조했다.

대한한의사협회를 주도적으로 만들어 3~4대 대한한의사협회장을 역임하였지만 후학인 한의사들에게 “생명을 구해야 의사라며 제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한 모습에 심한 꾸지람을 하여 당시 잘못을 깨닫지 못한 한의사협회의 배척을 받기도 하셨다.
한의학 산업과 교육, 제도화의 선구자이자 한의학 산업화의 모태인 한방제약회사를 설립하여 국민건강에 이바지한 공이 크다고 할 것이다.

혼신의 힘으로 교육 사업에 주력하다
1926년 서울미동초등학교 후원회 부회장으로 시작하여 양정중학교와 경북중학교, 서울대의대 후원회장을 비롯, 해방 후에도 한국외대와 성균관대 후원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62년도에 성균관 대학교 재단이사로 선임되었다.

6.25때 온양에 구호병원 만들다
피난 시절이던 51년 4월경 헐벗고 병든 사람들을 돕기 위해 당시 부산에 내려와 있던 정부 각부처와 합심하여 온양에 국립구호병원을 설립하여 인명구제에 나서게 된다. 쌀과 약을 준비하여 트럭을 타고 부산과 온양을 오르내리면서 당시 양의사였던 큰 딸과 사위 등 가족들까지 총동원하여 구호병원을 어려운 환경에서 운영하는 과정에서 아내가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도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런 공을 인정받아 53년 10월 대한적십자사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효와 충을 잃으면 나라의 근간이 흔들린다
올해로 40주년을 맞는 유도학회는 당시 박성수 성균관장을 비롯한 당대 석학과 유림 원로들이 창립을 지원했다. 초대 회장으로 구한말 의병장이었던 면암 최익현 선생의 현손인 최창규 서울대 교수가 추대되었고, 일송은 76년과 78년 2회에 걸쳐 성균관장을 역임하였다. 일송은 평소 효심과 충을 생명처럼 여겼다.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나라 잃는 아픔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사는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 충효의 사상은 진부한 유교적 유물로 치부되기도 한다. 하지만 인륜을 저버린 험악한 범죄가 만연하는 세상에서 돌아보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것이 바로 孝이며, 우리들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기초가 바로 나라의 안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송 박성수 회장은 1957년부터 1961년까지 우국노인회 한국노인회 회장과 1974년부터 1985년까지 한국漢詩협회장을 역임하면서 미국에서 개최된 세계한시대회에 참가, 한시의 우수성을 널리 전파하기도 했다. 박성수 선생은 90여년이라는 한 평생 동안 한학자, 한의학자, 제약실업가, 교수, 독립운동, 교육,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으로 현재까지도 존경받고 있는 한의계의 거목이자, 거성이다. 나라를 일제에 의해 빼앗긴 고난의 시대에 태어나 우뚝 솟은 남산의 소나무와 같은 일생을 사시다가 일제에 의해 손톱과 발톱을 다 빼어내는 모진고문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으시다 쓰러져 수년을 의식을 찾지 못하시다가 1989년 2월15일은 서거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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