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승인 : 2017-09-04 20:22 기자 : 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

사내가 평택에서 한달살이를 하는 동안, 두 번째로 만났던 사람은 시인 안현미다. 나를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등 떠민 사람들을 열거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현미는 하자는 놈 있을 때 하라는 문자 한 통으로 정신이 혼미하던 그 새벽을 말끔하게 정리해준, 참으로 화끈한 여인이었다. 셋은 개심사로 갔다. 개심사는 현미가 좋아하는 절이었고, 절보다는 앞마당 연못가에 고고하게 서 있는 배롱나무를 더 좋아해 후에 시 <배롱나무의 동쪽>이라는 절창을 남겼는바, 현미의 요청으로 가게 된 그날의 개심사 풍경에 대해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따뜻한 봄날이었고, 나무마다 새순이 파릇했고, 나뭇가지들 사이로 사내가 절을 감상하던 모습이 보였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영상이 재생되는 정도이다. 그때는 사내가 안성에 머물며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하기 전이라 나는 셋이 함께한 여행에서도 조금씩 긴장한 채 사내를 의식하고 있었고, 내 눈은 나도 모르게 계속 그를 쫓고 있었던 것 같다.
개심사를 나온 셋은 태안 파도리 해변 어느 횟집으로 갔다. 그때만 해도 나 역시 잘 몰랐었는데, 사내의 입장에서는 여느 횟집 수족관 속 물고기 중에 먹을 만한 건 거의 아무것도 없었지만, 현미가 한 턱 쏜다고, 육지 촌놈 입장에서 회 대접은 꽤나 근사한 것이었으므로 못 이기는 척 따라 들어갔던 모양이다. 지금도 현미는 개심사보다 횟집에서의 한 턱을 들먹이며 우리의 결혼에 일조한 자신의 공로를 인정해주길 강변하지만, 나와 사내의 반응은 늘 시큰둥했다. 그 싱싱한 바닷가 수족관 속에서 유영하는 물고기들조차 자연산은 몇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사내를 만나서 조금씩 익혀갔던 것인데, 그 사실을 처음 접했을 땐 적잖은 충격이었다. 연애하는 동안 우리는 서해며, 동해며 꽤나 많은 바다를 여행 다녔는데, 자연산이건 양식이건 어쨌거나 비린 것 한번 먹어보고픈 내 바람은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다. 사내는 그 일대의 수족관이란 수족관은 다 훑으며 물고기를 탐색하느라 긴 시간을 흘려보내기 일쑤였고, 언제나 결론은 먹을 만한 게 없다,였다. 나는 제발 한 마리라도 사내의 눈에 점지되어 주린 배를 채우고팠으나, 현직 마라도 횟집 사장에게 간택될 만한 고기는 아무데나 있지 않아, 결국 닭백숙 같은 엉뚱한 것을 먹게 마련이었다.
두 번째 나를 등 떠민 사람은 남자는 남자가 봐야 제대로 안다는 단서를 절대 빼먹지 않으나, 사실은 방어 한 마리에 사랑하는 누나를 넙죽 진상한 후배였고, 세 번째는 시인 안상학이었다. 안동 토박이답게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안상학 선배는 주역에도 능했고, 공교롭게도 그 당시에 그의 점괘에 따라 뜻한 바가 이루어진 사람들의 사례가 줄줄이 내 귀에 전해지는 바람에 나는 그의 비상한 능력을 철석같이 믿게 되었다. 작가회의 모임에서 만난 선배는 현미의 ‘고자질’로 내 연애 사실을 알게 되었고, 왜 자기한테 먼저 물어보지 않았냐며 선뜻 둘의 궁합을 봐주겠다고 했다. 그 동안 남자를 만나면서 궁합 따윈 본 적도 없고, 확률 게임이라는 사주를 믿지도 않았건만 어째 사내와의 관계에서는 그게 무척 궁금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용하다고 소문난 시인의 자발적 요청을 마다하면 무슨 사달이라도 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연애를 한다고 해서 결혼이 당연지사가 아닌고로, 사내에게 생년월일과 시를 물어보는 일 자체가 녹록치 않았다. 나는 좀 버벅대며 장난삼아 한번 보는 것일 뿐이라고 연막을 쳤지만,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사내의 목소리는 ‘경사났네, 지화자!’를 부르짖고 있었다.

선배가 메일로 보내온 궁합의 결과는 딱 세 줄이었다. “아무래도 인연을 만난 것 같다. 그 남자 내년부터 잘 나가겠다. 결혼을 하면 올해 해야겠다.” 내심 궁합이 나쁘면 그만 만나야 하나 걱정하던 차에 메일을 열어보고 꽤나 다행스러워했던 것 같다. 그리곤 사내와의 만남은 운명인가 보다고 믿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후에 내 결혼의 배경을 안상학 선배의 사주 탓으로 떠넘기려고 사람들에게 이 점괘를 얘기하면, 안상학의 점괘는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 격이 더러 있었던 것일 뿐이고, 나이 찬 여자의 결혼을 그럼 하지 마라,고 말리냐며 핀잔을 주는 이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내 눈에 뭐가 씌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것 역시 결혼으로 가기 위한 운명적 실수라고 밖에 달리 부를 말이 없다. 그리고 그럼에도 나는 선배의 점괘를 지금도 믿는다. 그 점괘를 따르려고 계획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정말 그해가 다 가기 전에 결혼을 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해 오월에 나는 내 작은 경차에 견공 세 마리와 짐을 꽉꽉 채우고 합천으로 내려갔다. 합천군 묘산면 곰터는 내 어린 시절의 전부를 차지하던 공간이다. 그 시절 나에게 가족으로서 전부를 차지하던 할매가 살고 있던 공간이다. 그해, 아흔 셋이 되신 할매는 담낭암 판정을 받았고, 3개월 시한부 생을 선고받고서는 높은 연세와 낮은 체력으로 수술은 생각지도 말라는 의사의 권유대로 집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할매는 시골집으로 가기를 원했고, 프리랜서로 살아가던 나는 당연히 할매의 집이자 나의 옛집으로 돌아갔다. 할매한테 삼시세끼 따순 밥상 차려드리려 간 것인데, 자식들이야 명절 때나 찾을 뿐이고, 오랫동안 혼자 지내던 할매는 옆집도, 아랫집도 폐가가 된 지 오래여서 오가는 사람마저 귀해 몹시 외로워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세상에 할매가 전부인 줄 알고 자란 막내 손녀가 돌아와 함께 지내는 것만으로도 할매는 힘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때만 해도 의사의 판단은 신의 선고와 맞먹는데, 통증도 거의 없는 채로 3개월을 훌쩍 넘기며 견디시는 걸 보니, 왜 아프기 전에 오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시시때때로 밀려왔다 가곤 했다.

마지막으로 내 등을 떠민 사람은 다름 아닌 할매였다. 내가 사내의 횟집에서 처음 술잔을 기울일 때, 안줏거리 중에 김치가 있었다. 일행이 김치 맛이 예사롭지 않다고 하자 사내는 합천에 사는 누나가 담은 거라고 했다. 그래, 그때부터 사내와 내가 은연중에 친밀감을 느낀 것은 합천이라는 공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서로 합천에 대해 알은 척을 하며 이야기를 쏟아내기도 했다. 사내의 큰누나는 엄마처럼 막내 동생을 챙겨주었고, 합천으로 시집을 가자 막내동생은 누나네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나이를 먹었다. 나보다도 합천을 더 많이 알고 있을 정도였다. 내가 그렇게 할매의 집으로 가게 된 것도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사내는 합천으로 나를 만나러 왔고, 할매는 혼기 찬 손녀의 배필감으로 사내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사내는 어딜 가도, 누구에게도 ‘먹어주는’ 첫 인상의 소유자였다.
1917년생이고 소학교도 못 다녀 글씨도 쓸 줄 모르는 할매는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매사에 진보적이었다. 내가 대학교 다닐 무렵부터 할매한테 자주 들었던 얘기는 남자는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사람 하나 진실하면 그만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내에 대해서 별로 묻지도 않았다. 거의 유일한 물음이 나이였고, 열한 살이나 많은 나이조차도 우리 할매한테는 대수롭지 않았다. 그보다 마흔을 바라보는 손녀 나이가 더 걱정이어서 ‘엥간하면’ 업어가주길 바랐는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어쨌거나 겉으로 보기엔 꽤나 동안인 사내는 우리 할매한테 합격점을 받으면서 결혼을 하기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악조건들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할매가 괜찮다면 다 괜찮은 것이다. 할매가 좋다면 다 좋은 것이다.
사내의 큰누나는 사내가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마냥 걱정스러워했다. 엄마가 살아 계신데도 업어 키운 막내에 대한 큰누나의 사랑은 자식 대하듯 무한했다. 그래서 자주 전화를 걸어 막내의 거취와 생활을 거의 다 파악하고 있던 터에 어느 날부터 마라도를 벗어나 평택으로, 강원도로 싸돌아다니는 것이 심상치 않았고, 눈치 꼽은 누나의 추궁에 막내는 실토를 했던 것이고, 결국 합천에 온 이상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내가 할매를 알현한 다음날, 나는 하는 수 없이, 받은 만큼은 줘야지 하는 심사로 사내를 따라 합천읍 어느 갈빗집 안으로 쭈뼛쭈뼛 들어갔다. 갔더니, 나를 보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 것이었다. 누나 부부와 막내아들, 그리고 서너 명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누군지 지금도 모르겠다. 누나의 시댁 식구들이었던 것도 같고, 결혼한 딸이었던 것도 같다. 아무튼 나는 너무나 준비가 안 된 채로 상견례를 치렀고, 그분들이 첫눈에 마음에 들어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안 든다고 말릴 입장은 전혀 아니니, 통과의례를 좀 급하게 치른 셈이 되었다. 그 후, 서로의 다른 가족을 만나는 과정을 거치면서 결혼은 기정사실이 되어갔다.
만약 우리 할매가 아프지 않았다면, 내가 계속 평택에 머물러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결혼을 더 늦게 했거나, 아예 하지 않았거나. 그러나 역사에 가정이 없듯이 개인사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그해 일어난 모든 일들은 우리의 결혼이라는 한 목표지점을 향해 함께 달려가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결혼을 한다면 할매는 어찌 해야 할까 고민도 깊어갔다. 사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사내의 누나가 합천으로 시집을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더 긴 시간 동안 할매를 모셨을 것이다. 그리고 할매는 더 긴 시간을 살아내셨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가정은 소용없는 짓이다. 그해 여름을 지나면서 나는 그 생활에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내 마음과는 달리 그때만 해도 요리 실력이 빵점에 가까운 나로선 특히나 아픈 사람 입맛을 돋우는 음식을 하루에 세 번씩 만들어야 하는 일이 쉬운 게 아니었다. 매달 기획기사를 쓰느라 취재를 다니러 다른 지방을 오가는 일도 녹록치 않았고, 밤새워 원고를 쓰던 생활리듬이 밥상을 차리는 일 때문에 어그러지자 일도 몸도 마음도 곧잘 힘들어지곤 했다. 그래서 나는 할매가 의사의 선고보다 훨씬 잘 견디고 있다는 것을 핑계로 그만 결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여러 가지 가능성이 열려 있던 터였다. 결혼을 하면 사내가 육지로 나올 계획이었으므로 그곳이 평택이 될지, 합천이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육지로 나와 어떻게 살지에 대한 밑그림이 희미했던 때기도 하지만, 사내나 나나 사는 게 별거냐는 무데뽀 정신이 투철하여 일단 결혼부터 하고 보자고 했다. 그렇게 한여름을 통과할 무렵, 결혼 날짜를 11월 25일로 잡고, 사내는 여름 한철 장사 잘해서 임대기간이 꽤 남은 횟집을 넘겨줄 만한 사람을 물색해 정리를 하고 나오기로 했다. 나는 혼자 대구에 있는 웨딩업체를 통해 결혼준비를 시작했다. 할매는 겉으론 당신 생각 말고 준비 잘 하라고 당부하셨지만, 그 말씀에 서운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걸 나도 할매도 다 알고 있었다. 그 외에는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렇게 여름이 끝나가는가 싶을 무렵, 그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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