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승인 : 2017-09-04 20:20 기자 : 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
1. 백두산정계비 설치 과정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는 국경선이 없었다.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 부근에 사는 주민들은 두 나라의 경계선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그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국경선을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이익은 산삼의 채취와 나무를 함부로 벌목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범월(犯越(덧말:범월))여라고 하였다. 조·청 두 나라는 이러한 복잡한 국경 문제를 정리하기 위하여 정계비를 세우려고 하였다. 청나라의 강력한 요청에 의하여 1712년(숙종 38)에 정계비가 세워졌다. 청나라에서는 목극등이 대표로 오고 조선에서는 박권을 접반사로 하고 함경감사 이선부를 부대표로 하여 국경회담에 임하게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목극등은 표면적인 이유보다 천지 확보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고압적인 태도로 조선 대표들을 남겨두고 군관과 통역관만을 대동하고 올라가 자기 뜻대로 백두산 천지 30리 밑에 정계비를 세웠다.
그런데 박권의 통찰력과 김지남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서 백두산을 조선의 영토로 인정받았고 천지를 조선 땅으로 확보 할 수 있었다. 
2. 백두산은 조선 땅
목극등과 접반사 일행들이 백두산 등정 문제로 의견이 갈렸다. 조선측은 목극등과 함께 백두산에 오르려고 하였고 목극등은 조선측의 접반사 일행 등반을 허락하지 않았다.
김지남은 목극등의 처소에 가서 접반사 이하 우리나라 대소 관인(官人)들은 이미 임금의 명령을 받았으므로 설령 도중에 엎어지고 자빠지더라도 결코 뒤에 남을 뜻이 없다는 것을 누누이 설명하였다. 목극등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김지남은 이러한 사실을 접반사에게 보고하였다. 접반사와 관찰사도 끝까지 낙후될 수 없다는 뜻을 여러 차례 설왕설래 하였지만 끝내 목극등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조선측은 따라갈 인원으로 도차사원인 삼수 부사 장세익, 부마차사원(夫馬差使員) 거산 찰방 허량, 접반사의 군관 이의복, 관찰사의 군관 조태상, 수석통역관 김지남, 부통역관 김응헌?김경문과 잡무담당 장교 3인, 길 안내인 3명, 나무를 베며 길을 만들 인부 10명과 그 외에 역졸 등등의 이름을 기록하여 들어갔다. 목극등은 명단에서 장세익과 김지남의 이름을 나이가 많아 산길을 걸을 수 없다고 삭제하였다.
김지남이 다시 일어서면서 말하기를 “제가 비록 나이가 많고 몸이 약하지만 이미 왕명을 받은 몸이고, 또 대인의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니, 정으로 보나 의리로 보나 대열에서 빠지는 것은 부당합니다. 비록 산골짜기에서 자빠지고 넘어지더라도 오로지 모시고 따라가서 작은 성의나마 다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목극등은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자네를 싫어해서 그런 것이 아니네. 노인의 몸으로 만약 병이라도 나면 차마 버리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중도에서 돌아올 수도 없으니 어찌 곤란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대 아들 김경문이 충분히 자네의 임무를 다할 것이니 그대는 아무쪼록 마음을 놓도록 하게.”라고 당부하므로 김지남은 접반사를 찾아가 목극등이 도무지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박권 접반사는 ‘산길이 극도로 험하여 사람들이 전복되는 사고를 초래할 수 있고, 백두산은 한여름에도 얼음과 눈이 녹지 않으므로 만약 풍우를 만나면 사람과 가축이 많이 죽거나 부상하는 염려가 있겠다.’는 점과 또 ‘두 대표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결코 뒤에 남게 할 수 없다’는 일로 다시 김지남에게 명하여 설득해 보라고 하였다.
이번에는 문서를 작성하여 답서를 받아 보려고 하였다. 접반사의 문서에는 “귀하께서는 저희들로 하여금 수행하지 말고 먼저 무산으로 가서 기다리라고 하시는데, 이는 필시 귀하께서 저희들이 노쇠하고 피로한 모양을 보고 딱하게 여기셔서 이와 같은 곡진한 하교를 내리셨습니다만 저희들은 이미 임금의 명을 받아 황제의 칙사 일행을 접대하는 일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만 편안한 곳에 머물면서 귀하만 홀로 험난한 길을 가게 한다면 이는 실로 의리와 명분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원컨대 귀하께서는 살펴주셔서 저희들 중에서 한 사람만이라도 행차를 모시고 가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라고 간청하였다.
목극등이 이를 다 읽고 “두 분이 말씀하신 것이 진실로 옳은 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황제 폐하의 뜻에 따른 것이므로 부득이 나는 몸소 가지 않을 수 없다. 접반사와 관찰사께서는 모두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므로 결코 나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고 또다시 접반사와 관찰사의 동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목극등은 왜 두 사람의 동행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물론 두 사람이 연로한 것도 사실일 것이다. 접반사인 박권의 나이가 당시 54세였다. 그러나 목극등의 진정한 의도는 정계하는 과정에서 시비가 일어나는 것을 막고 자기의 의도대로 정계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김지남은 이번 행차의 목적은 오로지 국경을 정하는 한 가지 일이었는데, 만약에 한 점이라도 미흡한 것이 있게 되면 반드시 삽목연지(揷木軟地:무른 땅에 꺾꽂이한 것처럼 불안함)의 처지에 이르게 될 것이므로, 임무를 맡은 이래 밤낮으로 걱정하였다.
김지남은 한 가지 꾀를 내어 목극등의 의도를 떠보기로 작정하고 목극등에게 청하기를 “소관(小官)은 조선의 백성이요, 백두산 또한 조선의 땅인데, 우리나라의 명산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으므로, 원컨대 한 번 올라가 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지만 길이 너무 멀어 이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번 행차에 대인께서 소관의 늙고 병든 것을 불쌍히 여겨 동행을 허락지 않으시니, 백두산의 진면목을 한 번 보려는 소원이 허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대인께서는 반드시 유윤길(劉允吉) 화사원(畵師員)으로 하여금 산의 형세를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한 폭을 내려 주신다면, 소관의 평생소원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대인의 은덕을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고 간청하였다.
목극등은 흔쾌하게 “대국의 산천은 그림으로 그려줄 수 없지만, 백두산은 이미 그대들 나라 땅이니 그림 한 폭 그려주는 것이 어찌 어렵겠는가?”라고 하였다. 김지남은 “만약에 그것이 대국의 산이라면 어찌 감히 부탁할 마음이 생겼겠습니까?”라고 재차 확인하였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너무나 기쁘고 다행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고 물러나왔다.
숙소에 돌아와 두 대표에게 보고하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두 대표가 무슨 말이냐고 재촉하므로 김지남은 목극등과 주고받은 말을 보고하며 청나라가 “백두산을 조선 땅”이라고 인정한 사실을 털어 놓았다. 접반사와 관찰사는 매우 기뻐하며 “조정에서 염려하던 것이 오로지 그것이었는데, 목극등이 ‘백두산은 그대들의 땅’이라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계책을 써서 그들의 뜻을 탐색하고, 겉과 속을 꿰뚫어 보니 참으로 일을 잘 했다고 하겠네.”하며 김지남을 칭찬하고 즉시 이러한 내용을 장계를 작성하여 조정에 보고 하였다.

3. 백두산 천지(天池)를 찾다.
백두산정계를 마치고 목극등 일행이 무산부의 풍산진에 도착하였을 때 목극등은 지도 한 벌을 김지남에게 내주면서 국왕에게 갖다 바치라고 하였다. 이 지도는 목극등이 백두산의 분수령 상에 정계비를 세우고 이를 표시한 공식지도였다.
김지남이 즉시 박권 접반사에게 전달하였고, 접반사가 자세히 살펴보니 압록강의 근원에는 두 갈래가 있는데, 한 줄기는 백두산 꼭대기 남쪽 가에서 흘러내리고 또 한 줄기는 백두산의 서북쪽에 흘러내려 하나로 합치는데 남쪽에서 흘러내리는 줄기는 두만강의 근원과 멀지 않은 곳에 마주하고 있다. 그러므로 압록강의 근원이라는 이름을 썼고 서북쪽의 줄기에는 그 이름을 적지 않았다.
박권 접반사가 김지남에게 말하기를, “이 강줄기도 역시 압록강의 근원이라고 쓰는 것이 지극히 요긴한 일이니 자네가 좋은 말로 잘 설득하여 반드시 이름을 써서 받아오라. 그렇지 않으면, 자네가 앞서 근무한 성적이 이 일로 다 깎일 것이다”하였다.
김지남이 접반사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당초 정계비를 세울 때 선전관 이의복과 김응헌, 김경문 등이 목극등에게 적극 주장하여 ‘이 역시 압록강의 근원이니 함께 비를 세워 경계를 밝혀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끝내 주장을 관철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소인의 말주변으로 어떻게 반드시 관철시킬 수 있겠습니까?”라고 어려움을 나타냈지만 박권 접반사는 김지남에게 이를 관철하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김지남은 매우 난처하였지만 그 지도를 소매 속에 넣고 목극등의 숙소로 나아갔다. 목극등은 바야흐로 시위, 주사와 함께 모여 있었다. 김지남이 앞으로 나아가 그 지도를 펴놓고 간청하기를 “이 지도를 보면 압록강의 근원이 처음에는 두 갈래인데, 한 줄기에는 강의 근원이라고 쓰고 한 줄기에는 쓴 바가 없으니 지금 만약 국왕 어전에 이 지도를 바치면 이 하나에는 왜 이름을 쓰지 않았느냐고 반드시 물을 것입니다. 우리들 왕명을 받들고 나온 신하의 도리로서 어찌 황공하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대인께서는 이러한 이치와 형세를 양해해 주시어 다른 한 쪽에도 이름을 써주는 일을 화공 유윤길(劉允吉)에게 하교해 주심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목극등은 “네가 말하는 바가 비록 이치에 가까운 바이지만 나 역시 돌아가 황제께 상주할 때 혹시 물으시기를 강(江(덧말:강)) 하나에 어째서 근원이 둘이냐고 하시면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느냐? 이것은 황공하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김지남은 물러서지 않고 다시 한 번 목극등을 설득하기를 “저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어찌 강에 두 갈래의 근원이 있다는 것으로 논란하겠습니까? 비록 3, 4, 5, 6개의 갈래가 있더라도 이것이 강의 근원이면 그 이름을 아울러 쓰는 것이 사리에 당연한 것입니다.”라고 우겼다.
목극등은 하나의 강에 두 개의 강원이 있을 수 없다고 일축하였다. 김지남은 자리를 차고 나아가서 다시 간청하기를 “비록 돌아가서 황제께 상주하는 지도에는 이름을 쓰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주는 지도에는 이름을 써 주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문책이 돌아오는 것을 면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심이 어떠하시겠습니까?”라고 기지를 발휘하였다.
목극등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 산에 무슨 보배라도 산출되는 것이 있느냐? 부득이 너의 말에 따르겠다.”고 말하며 즉시 화공 유윤길을 불러 지시하였다. “이 서북쪽 강줄기의 머리에 ‘압록강원(鴨綠江源)’ 4자를 써서 주어라”고 하였다. 시위가 김지남을 보고 농담삼아 말하였다. “명일에 다시 오면 내가 너에게 산을 하나 주고, 그 다음 날 다시 오면 주사가 너에게 산을 하나 줄 것이니, 모두 세 개의 산을 확실히 얻게 될 것이다”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크게 웃으면서 흩어졌다.
김지남이 즉시 돌아와 두 대표에게 보고하니 박권 접반사가 크게 기뻐하며 김지남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일을 잘 처리하여 이제 끝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백두산 천지를 우리의 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 이튿날 저녁에 회령부에 도착하니 홍이격이 자기 숙소에서 김지남을 만나서 말하기를 “엊저녁에 참으로 우스운 일이 있었다는데 자네는 알고 있는가?”라고 말하였다. 김지남은 우스운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목극등이 압록강원을 두 군데 써 준 것을 후회한 내용이었다.
목극등은 김지남의 재촉 때문에 강의 근원의 이름을 써준 후에 바로 그 조치를 후회하여 밤새도록 자지 못하고 혼자 입으로 말하기를 ‘단지 여기에 남긴 지도에만 강의 근원을 쓰고 돌아가서 상주해야 할 지도에는 강의 근원을 쓰지 않았으니 이는 황제를 속인 결과가 되었다. 이미 써서 준 물건을 도로 반환받아 말소하는 것도 또한 체면상 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백방으로 생각해도 끝내 실제대로 적는 것이 낫겠다.’고 하고 이에 지도를 꺼내 또 강의 근원을 써 넣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압록강원” 4자를 지도에 써 넣는 것이 아니고 백두산의 천지가 우리의 소유로 확정되는 중요한 사실이다. 김지남의 재치있는 외교 활동으로 백두산 천지를 우리의 영토로 확보할 수 있었다.
- 영토학회 부회장 이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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