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승인 : 2017-07-31 20:14 기자 : 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
영조대왕이 왕비를 잃고 후비를 얻는 중에 세 처녀가 최후로 간택이 되었다.
영조대왕이 김한구의 딸에게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아버지 이름을 수놓은 방석을 깔고 앉지 않느냐?
다른 처자는 모두 자신의 아버지 이름이 쓰인 방석에 앉아있는데 말이다."
"딸이 어찌 아버지를 깔고 앉겠습니까?"
"......"
대왕은 말을 잇지 못하였다.
아버지 이름이 수놓인 것은 바로 아버지가 아닌가? 부모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자는 불효라는 말이다. 왕비가 안 되어도 좋으니 딸 노릇을 제대로 하겠다는 갸륵하지만 맹랑한 대답이었다.
"고개 중에는 어떤 고개가 제일 넘기 힘이 드는 고?"
"대관령 고개입니다.“
"추풍령 고개입니다."
그러나 김한구 딸은 "가장 넘기 힘든 고개는 보릿고개입니다." 라고 하였다.
몰락한 양반의 딸로 충청도 서산 당진쪽에서 어렵게 살았던 김규수는 백성들의 굶주림의 고통을 이야기한 것이다.
“ 그럼 꽃 중에서 무슨 꽃이 제일인고?"
저마다 목련꽃이라고도 하고 연꽃이라고 하는데, 김한구의 딸은 헐벗은 백성의 옷이 되고 이불이 되어주니 목화꽃이 제일이라는 답하였다.
결국 영조대왕은 백성의 고통을 헤아릴 줄 아는 김한구의 딸을 왕비로 간택하게 된다.
이리하여 경주 김씨 김한구 딸이 영조대왕의 두 번째 왕비인 정순왕후가 된 것이다.
영조35년 1759년 그녀의 나이 열네 살이었다.
1763년 온 나라에 흉년이 들자 정순왕후는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도록 하고, 5품 이하 부인들도 하루 2끼니만 먹도록 명하였으며 궁중에서도 찬을 간소하게 하였다. ‘임진일기’를 한글로 번역하여 유비무환의 정신을 갖도록 하였으며, 정순왕후 30세에는 효가 사람의 가장 중요한 도리라는 내용의 ‘효제’ 편을 저술하였다. 양잠을 권장하여 부강한 나라를 꾀하였다.
(재)국제농업개발원 webmaster@iadi.or.kr
<저작권자 © 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