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승인 : 2017-04-27 20:06 기자 : 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
- 시인 이유미
나는 새내기 시인이다. 사실 국문학과를 나온 것도, 시를 배운 적도 없지만 시인은 누구나 될 수가 있다. 한숨과 눈물이 시가 되고 사랑이 시가 되며 고통이 시가 된다. 나는 남편이 한밤중에 잠을 자다 쓰러져 심폐소생술로 심장만 겨우 살려내어 중환자실에 들어가 있는 와중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에 시를 쓰려고 쓴 것도 아니다. 중환자실에는 가족도 하루 2차례만 면회가 허락되어 중환자실 입구에서 눈물 흘리며 정신이 절반 나가있는 나는 동생 손에 끌려 집으로 갔다. 내 속에서 터져 나오는 애통함, 의식불명 상태의 남편에게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무언가 해야 할 말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 나의 시는 시라기보다는 절절한 눈물이며 절규였다. 아직은 보낼 수 없는 남편에 대한 못다한 사랑과 한이 서려있는 눈물의 글이었다. 사랑한 만큼 안타깝고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다는 후회 때문에 자학하며 남편의 죽음을 앞두고 혼란과 두려움 등 복잡한 심정 속에 사로잡혀있던 나를 구원해 준 것이 바로 그런 절박한 나의 심정을 글로 토해놓는 것이었다.
속으로 곪아가는 고름을 짜내듯 토해내는 글은 마치 피고름이 밖으로 흘러나오듯 고통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나름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다.
보름이 지나서 남편은 갔고 나의 시는 남았다. 나의 블로그에 우연히 달려있는 댓글을 보고 나는 처음으로 나의 슬픔과 고통이 타인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댓글을 단 분은 상처(喪妻)한 상태에서 나의 글을 읽고 위로가 되었다는 감사의 댓글을 달았다.
“예술가란 슬프다고 자살하지 않고 ‘슬프다’라고 공책에 쓰는 사람이다. 절절히 써내려 가다보면 어느덧 슬픔은 사라지고 그 글을 읽는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작용이 일어난다”라고 화가 김점선은 예술가를 정의했다.
세상에 만물이 제각기 다른 모양새로 태어나 살아가듯 서로 다른 다양성이 있어 더 아름다운 인생. 각자가 처한 다른 환경과 인생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다 다르니 풀어내는 시의 내음도 다르다. 그래서 각자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70억 인구 모두가 시인인 것이다. 일본의 할머니 시인 ‘시바타 도요’는 98세 되던 2011년에 시집을 냈다. 시집 ‘약해지지 마’는 일본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번역 출간되었다. 그의 시를 보면 노인의 눈높이에서의 인생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나라에는 시인의 숫자는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시가 일반 시민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환경이다. 시인들과 시 낭송모임에 가보면 자신들의 잔치로 끝나버린다. 시를 접하게 되면 먼저 이 시가 무엇을 말하는가를 마치 시험 보듯 고민하는 자세를 만들어 버린 것은 교육의 잘못이다. 시를 있는 그대로 감상하지 못하게 만든 잘못된 교육은 시의 무덤을 만들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인이 많은 나라인데 시집은 팔리지 않는다. 많은 원로 시인들의 시는 난해하여 이해하기가 힘들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차라리 그런 시를 쓸 바에야 대학 강단에서 언어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맞다. 시를 시민들과 멀리하게 만든 데 이런 난해한 시를 쓰는 원로들에게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고 본다. 기교 없이도 삶에서 우러나온 진솔하고 소박한 글이 감동을 준다. 한국의 문학이 국민에게 외면 받는 것은 일정부분 문인들의 책임이 있지만 근본의 문제는 한국의 삐뚤어진 사회현상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전통의 가치를 무시하고 왜곡하는 사회현상과 교육은 한국사회에 너무도 뿌리 깊게 만연하여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주체성을 잃어버리게 한다. 마치 성형수술천국이 되어버린 한국에서 성형을 통해 새로 탄생한 ‘나’를 두고 쌍꺼풀이 아닌 이전의 나는 촌스럽고 이마와 뺨에 빵빵하게 보톡스나 지방을 넣고 코를 높이고 유방을 크게 한 정체불명의 성형된 새로운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자신답다는 가치’를 잃어버린 한국인의 슬픈 자화상이다.
우리의 것이 바로 세계적인 것이라고 떠들지만 실상 한국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섬뜩할 만큼 외부의 것들로 채워져 있다. 한국의 고유예술분야는 마치 숨겨두었다 가끔 꺼내보는 골동품처럼 양념으로 사용되는 사회가 되어버렸으니 가야금이나 창과 같은 우리의 것은 이미 진부한 것으로 꼬리표가 붙어있어 가끔 초대되어 가보면 예술의 전당 공연조차 사람이 없어 텅텅 비어있기 일쑤이다. 그나마 초대된 손님들이 중간 쉬는 시간에 사라져버리고 만다. 어려서부터 듣고 보고 즐기지 않았던 예술이 어찌 공감을 얻을 수가 있겠는가!
서양에서 들어온 예술문화는 교육의 영향으로 고유의 예술문화 쪽과는 양상이 많이 다르다. 예술의 전당에서도 서양예술 공연장이 훨씬 공간도 크고 입장료도 비싸고 사람도 많다. 관객들의 주 연령층이 어려서부터 배우고 듣고 보던 예술이라 나이가 든 분들에게는 어색하고 불편한 공연이라도 그들에게는 공감을 받고 박수갈채를 받는 것이다. 언젠가 야밤에 단군상의 머리를 내려쳐서 두 동강 내버렸다는 뉴스를 보았다. 개방과 함께 들어온 기독교 문화는 짧은 시간에 그 뿌리가 깊이 박혀버렸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유일신 신앙의 기독교인들에게 단군상은 잊고 싶은 불편한 진실이고 악마의 우상과 같은 것이리라.
단군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애써 만들어 놓은 단군상을 보면서 국민들이 우리 조상의 빛난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미래를 위한 희망을 키우기를 바라면서 만들었을 것이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단군의 역사가 단지 신화일 뿐이고 조상을 기리는 제사를 모시는 것도 귀신을 숭배하는 것을 치부되니 단군상은 목이 잘려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보라! 우리가 비웃는 북한의 김일성 묻지마 숭배의 엄청난 동상들보다 더 많은 이교도의 동상들이 한국의 교회와 절에 가득하지 않은가! 불자들과 기독교인들에게는 소중한 예수와 부처님상이지만 다른 종교인들에게 그 역시 깨뜨려버리고 싶은 우상이 아니던가!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부모없이 세상에 태어난 자는 없다. 만난 적도 없고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예수와 마리아를 어머니로 부르고 그리스도라고 부르면서 이교도의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왜 자신의 나라의 조상인 단군할아버지를 부정하고 우상으로 치부하는 가!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국가로 종교의 자유가 인정된다. 우리나라처럼 많은 종교가 존재하는 나라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내 종교가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종교도 존중받아야 하는데 단지 세력이 많다고 진리는 아닐진대 내 종교가 중하면 다른 사람을 더 감싸 안아야 하는 것이 순리이지 종교가 다르다고 손가락질하고 무시하고 등 돌리는 건 성숙한 자세가 아니다. 카톨릭의 나라도 있고 불교국도 있으며 회교국도 있다. 종교를 깊이 연구한 사람들은 종교의 뿌리가 실상은 하나라고 이야기한다. 다르다고 싸우는 종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성숙한 종교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종교가 없어도 진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 실은 진정한 의미에서 가장 멋진 종교인이 아닐까! 종교란 우주의 섭리와 같이 모든 것을 포용하고 용서하며 사랑으로 화합하는 것이 아닌 가.
내가 믿지 않는다고 우리의 유구한 역사가 사라지거나 변해버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소중한 정신적 자산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자세는 미래 선진 한국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다.
종교도 외국 것, 문화와 예술도 외국 것을 선호하고 가치를 두면 우리 전통의 가치는 사라지고 마치 성형미인들이 길거리를 장악한 것처럼, 역사도 없고 종교도 문화예술도 없는 자신의 본얼굴을 잃어버린 뿌리 없는 민족으로 추락하게 될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우리의 가치를 다시 찾아나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고유문화적 유산의 가치를 되살려 예술, 문학, 종교와 모든 면에서 우리의 소중한 가치를 재조명하고 계승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 바로 알기, 우리의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배우고 발전시키기로 앞서가는 문명국으로 발전시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재)국제농업개발원 webmaster@iadi.or.kr
<저작권자 © 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