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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자금을 벌기위해 ‘장수천’ 샘물사업 시작하다

기사승인 : 2017-10-10 19:12 기자 : 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

환경국제전략연구소 김동환 소장

노무현대통령과의 인연은 고인이 생전에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95년부터 4년간의 공간속에 이뤄진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종로구에서 또다시 낙마하면서 청문회스타와 선거전에서의 표밭관리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결론을 돌출했던 그 시절에 샘물이란 매개체를 통해 대화가 오갔고 88올림픽 샘물업체 납품을 위한 심의위원으로 활동했던 나는 생수 사업 하면 안 된다, 이차 저차 하여 어렵다는 자문을 끝으로 더 이상의 교감은 지속되지 않았다.

샘물사업을 하면서 차려진 강남역 주변의 사무실, 종로 사무실, 그리고 안희정, 이광재 도지사 그리고 돈줄이던 이기명씨, 강금원 회장, 김노식 前국회의원 등 바작바작 속 타는 샘물 사업의 현장에서 펼쳐진 인연의 끈을 시리즈로 재조명하고자 한다.

얼마 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는 3년상을 마치고 탈상을 하는 추도식이 열렸다. 1.2주기에는 비가 뿌리더니? 기어코 떠나보내는 올해는 땅을 다지려는지 햇살이 여름이다.「나는 봉화산 같은 존재야, 산맥이 없어, 봉화산이 큰 산맥에 연결돼 있지 않고 딱 홀로 서 있는 돌출 돼 있는 산이야」라는 노무현대통령의 육성도 가슴을 더 아리게 한다.
 
영원히 떠나보내는 마당에 노무현 재단 등이 밝힌 연보에도 나타나지 않은 삶의 흔적중 물장사에 대한 이야기로 회상의 시간을 가져본다. 19년 전인 92년 제 14대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서 낙선하고 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 또다시 낙선 이듬해인 96년 15대 총선에서 종로에서 낙선 한 이후 몇몇 의원들과 97년 음식점 하로동선을 개업했던 당시로 시간은 돌아간다.

당시 샘물협회 회장인 김노식 전의원의 회사인 설악샘물을 상시적으로 출입하던 시절이다. 김 회장의 주변에는 서청원의원등 전현직 정치인들이 자주 들락이며 미래의 정치적 야심을 일깨우던 사랑방이며 가난한 정치인들에게는 샘물과 같은 자금줄이기도 했다. 이때 야인이던 노무현전대통령도 종종 김 의원을 찾아 만남을 갖기도 했다. 그런 만남 속에서 노대통령은 샘물사업에 대해 무척 희망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는 샘물 허가가 보사부에 있었고 허가는 설악샘물을 끝으로 14개 업체로 묶어 있었던 시절이다. (1호는 다이아몬드 샘물(현 엘지 생활건강)) 그러나 노대통령이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은 95년 보사부의 음용수과가 환경부로 옮겨오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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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건설부 상하수국장으로 재임하던 곽결호 前장관이 환경부 초대 상하수국장으로 오면서 88년 올림픽이후 커져가던 샘물사업의? 전면개방이냐 보호냐는 날선 대립도 막을 내리게 된다.(당시 환경부 초대음용수과장은 정도영 前상하수도협회부회장) 40여개 이상의 무허가 샘물사업을 수질개선부담금(20%,부가세는 10%)을 부과하는 조건으로 전면 허가해주게 된다.

당시의 샘물사업은 봉이 김선달이라는 이미지로 정치권 뿐 아니라, 금융권, 학계, 지주, 기독교(할레루야 샘물), 불교, 카톨릭(미원샘물-충북청원, 작은예수회)등과 정씨, 김씨, 윤씨 등 문중등도 거대한 대박사업으로 인기가 치솟아 있었다. 이때 충북 옥천군 장수리 656번지에는 장수천이란 샘물회사가 무허가 공장을 지어놓았고 지하 시추공을 3개정도 파 샘물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샘물 사업은 지하수가 나온다고 해서 사업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허가를 양성화 해주는 대신에 엄격한 환경영향평가를 받아야 했으며 시추공과 함께 감시정을 파야 했으며 수질측정 장비를 설치해야 하고 수질분석기등 실험실을 갖춰야 하고 여과기, 세병기 등 각종 생산시설을 위생적으로 갖춰야 했다.

장수천은 지하시추만 간신히 하고 허름한 공장만 지어 놓았지 제품을 생산할 수 없는 상태였다. 장수천은 먹는샘물 허가등록을 마치지 않았고 토지와 공장 등록만 95년 10월 17일 충북 옥천군 청성면 장수리 656번지에 등기부 등본을 마치게 된다. 따라서 무허가로 정상적인 판매는 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마침내 노무현대통령은 02년 12월 19일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이듬해 5월 기자회견을 한다.장수천과 관련된 측근 비리를 해명하는 회견에서 장수천을 인수하는 경위에 대해 “1995년 당시 민주당 구미지구당 위원장이던 이성면 씨 부탁에 의해 나를 포함, 7명이 4억원의 보증을 서면서 장수천과 인연을 맺게 됐다. 그런데 회사 상태가 안 좋아 조금 더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당시 영업정지 상태에 있었던 장수천에 환경영향 평가비용을 일부 지원했다. 투자금이 증가함에 따라 투자지분도 증가하게 됐고 1996년 말쯤에는 사실상 회사를 인수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다.

아울러 장수천 자금담당본부장을 맡았던 안희정 충남 도지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물장사를 하게 된 이유에 대해 사업가로서는 전혀 무지한 노대통령에게서 사업도 청문회스타와 같이 정치적 흐름으로 다가갔음을 고백하고 있다

1993년 노 대통령은 국민회의 부총재로 선출됐다. 국민회의 내 영남권 대표주자로서 책임과 권한을 위임받은 것이다. 그는 되지도 않는 영남지역 지구당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여러 사람에게 부탁했다. 그 과정에서 지구당위원장들의 빚보증을 많이 서줬다. 당시 구미시 지구당위원장이 친척의 사업을 자신이 하게 되면 지구당 사업에도 큰 보탬이 될 거라고 해서 1995년 6·27 지방선거 전인 6월10일경 보증을 서 줬다.

노 대통령이 생수 사업을 시작한 것은 1996년 가을 무렵이다. 그 해 4월 총선에서 낙선(종로)하고 안산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웬 생수사업을 하시냐’고 했더니 ‘지난번 보증 서준 것이 말썽이 났는데 조금만 투자하면 그 회사를 인수해 사업을 할 수 있겠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샘물업계에서는 빚보증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생수가 나는 땅인 장수천을 경영하기 위해 부산상고 선후배들을 중심으로 생수사업을 한다라는 말들이 정설처럼 퍼져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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