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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어머니 ‘간호 패전기’ <제2편>

기사승인 : 2017-10-10 14:03 기자 : 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

어머니는 "치매라고? 난 아무 일도 없어!"라며 거부

2017年 3月 16日 松浦 晋也(마츠우라 신야) / 번역 : 오마니나

인생을 마음 껏 즐기고 있었을 어머니에게 치매일지도 모르는 의심이 생겼다. 나는  그것을 외면해 왔지만 이젠 사실여부를 확인해야만 한다. "병원에 데려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고 해도, 우선 어느 병원의 어느 과로 모셔 가야할 지를 알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다행히 여동생의 친구가 치매 전문의였으므로 우선 메일로 상담을 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어느 과에 해당하는지, 어떤 치료법이 있는지, 앞으로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인지.
그리고 가족으로서 가장 신경 쓰이는 "대체 어느 병원의 어느 의사에 가는 것이 좋을지." 모르는 것 투성이 속에서 하나하나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은 지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어머니 본인이 병원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나는 정말 아니야"라며, 철저하게 거부했다.
지난번에 언급한 어머니의 상태는 ‘치매의 시작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아마추어라도 쉽게 상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을 인식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본인이 가장 받아들일 수 없어
나 자신도 어머니가 치매가 아닌가 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어머니 본인은 그 이상으로 "자신이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원래 병을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병원에 가는 습관도 없다. "나는 아무렇지 않아.  왜 내가 병원에 가야하니"라면서, 거부하셨다.

어머니는 이성적이지만 그 이상으로 감정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감정적으로 납득할 수없는 것에는 강한 저항을 나타내는 성격인 것은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 이 치매에 대해 저항은 의외로 처절했다.
그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원래 치매는 본인에게 질병의 자각은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뇌의 병변은 기억이나 자아라든지 성격과 같은 자기 자신 그 자체가 변화?열화 되어간다. 변화하고 있는 자신이 자신의 변화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물며 치매는 얼마 전까지 "치매"라는 차별적인 명칭과 함께 공포와 경멸의 대상이었다.
자신이 그런 병에 걸려있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나라도 내가 치매가 되었을 경우, 순순히 사실을 인정할 지 자신이 없다.
 
자신의 증상을 인정하느냐의 여부는 성격에 따라 결정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어머니는 매우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었다. 활달한 삶을 살아온 것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집안일도 취미도 일도 공부도 열심히 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 치매에 의해 지금까지 노력해 획득한 다양한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어머니에게 견디기 힘든 상황이란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상황 하에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머니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주변으로 칼날을 향하게 된다. 칼이 겨눠진 그 앞에는 가장 가까운 직계 가족, 즉 내가 있었다.

"왜 병원에 가지 않으면 안되는 거니"
"왜 내가 검사 따위를 받지 않으면 안되니"
"제대로 날 돌봐주지 않은 네가 나쁘다. 제대로 나를 보살펴"라고 한다.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대책에 반대하고 저항한다"는 어머니의 태도는, 그 후 일이 있을 때마다 나타나 나를 괴롭히게 되었다.
내 간호에 대한 고통의 절반은 간호 받는 어머니 본인의 거부와 저항이었다.


헌신하는 사람이 미움 받는 불합리
조사해보니 간호받는 측과 하는 측의 불화는 비교적 일반적인 것 같다. 게다가 불화의 화살은 가장 가까운 사람, 즉 직접 간호하는 가족에게 향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가끔 문병하러 오는 친척들에게, 가장 신세를 지고 있는 간호 담당자를 욕하기도 한다든가. 가장 헌신을 요구당하는 사람이 가장 기피된다는 것은 대책이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도중에 죽지 않는 한 늙어간다. 늙어가는 이상, 언젠가 자신이 어머니와 같은 상태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눈앞의 어머니는 미래의 자신일 지도 모르는 것이다. 간호라는 것은 동시에 자신의 늙어가는 법, 나아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기도 했다.

꽤나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보고 했지만, 결국에는 설득은 포기했다. 설득한다 해도 금방 잊어버린다는 것을, 일상생활 속에서 조금씩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통원 당일 아침에 "만약을 위한 검사니까 갖다오도록 하세요"라고 부드럽게, 또한 가부를 듣지 않고 모시고 가기로 했다.
병원에 간다는 것은, 주치의를 택하는 것이도 하다. 나로서는 가능한 좋은 의사가 어머니를 진찰해 주었으면 했다. 이것 저것 검사하고 상담을 해서 "여기라면"이라고 선택한 것은 근처의 종합병원의 신경내과 A의사였다. 즉시 예약을 하려고 병원에 전화를 하자, "신규 환자는 상당히 기다리셔야 됩니다"라고 했다. 나는 기다리기로 하고, 다음 날 2015년 2월의 진료예약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것은 실패였다. 서둘러 병원에서 확정진단을 받고, 그 후의 간호준비를 시작했어야 했던 것이다.
 
나는 너무도 무지했다. 치매가 어떤 상태를 나타내면서 진행될지를 몰랐고, 또 그 진행 속도도 몰랐다. 또한 간호에 있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간호용 침대를 비롯한 어떤 하드웨어를 준비하고, 누가 어떤 순서로 간호를 할 것인가 하는 소프트웨어를 생각하는 것도, 알지 못했다.
마음 어딘가는, 치매를 만만하게 보았던 것이다. 아니, 아직 그 시기에도 "할 만 할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던 것이다.

2014년 가을 당시에는, 어머니는 다양한 이상함이 보이긴 했지만 일상생활에 큰 문제가 연달아 발생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 계속하고 있던 인근 유료 수영장에서 수영을 계속했고, 이전과 같이 깔끔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끼니는 자신이 준비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그 때 나는 상당히 바빴다.


그리고 내가 쓰러지다
"행성탐사기 '하야부사2'의 도전" 소행성 탐사기 "하야부사 2"의 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신작으로 책 2권을 동시병행으로 쓰고 있었다. 가뜩이나 바쁜 와중에 어머니의 뒷바라지가 더해진 결과, 나는 상당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10월 후반의 금요일, 나는 왼쪽 귀 뒤쪽에서 턱까지 습진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토요일에는 붓기가 번졌다. 나는 귀에 문제가 있는 가해서 이비인후과에서 응급처치를 받았는데, 진단은 대상포진이었다.

수두 바이러스가 신경에 들어가 습진과 함께 심한 통증을 일으키는 병이다.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발병하기 쉬우며, 일반적으로 한 번 걸리면 면역이 되어 다시 걸리지는 않는다. 나는 대학졸업 논문을 위한 실험에서 밤샘작업을 계속했다.

이비인후과 의사는, 전문이 아니기 때문에 치료할 수 없다고 했다. "우선 항바이러스제를 처방할 테니 월요일은 피부과에 가십시요." 일요일, 습진은 더 확산되어 신경성 격통이 심해졌다. 잠 못 드는 밤이 지나고 월요일, 인근 피부과에 가자 의사는 한 눈에 "얼굴과 가깝기 때문에 자칫하면 나중에 안면마비가 남을 수 있습니다. 입원하는 편이 좋다"며 종합병원에 소개장을 썼다.
그대로 나는 종합병원의 피부과에 입원하게 되어, 하루 종일 항바이러스 링거를 맞는 신세가 되었다. 격통에 잠을 못자고, 잠을 못자는 사이에 2권의 책 편집자가 교대로 "원고 아직입니까?"라며 재촉하는 메일이 날아온다. 4인실 침대가 없어 개인실에 들어간 나는 "어차피 아파서 잘 수 없으니까"하고는 간호사의 눈을 피해 밤새 원고를 썼다.

어머니는 아직 그다지 문제없이 혼자서 집에 둘 수 있었다. 행동이 이상하게 되었다고는 해도 아직 어머니의 일상은 겉으로는 평온했다.
그대로 멈춰주었으면 아직 희망이 있겠지만, 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어머니의 증상은 서서히 진행되어갔다.

11월 중순의 일요일, 어머니가 "친구를 만날 약속을 했으니까, 차로 데려다 달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도 무엇 하나 확실치 않다. 몇 차례 전화가 걸려 왔기 때문에 아마 약속이 있겠거니 하고 자동차로 모셨더니, 이번에는 어디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 지가 확실치 않다.

"저기 모퉁인가" "이쪽 까페인가"라고, 듣는 대로 가봤지만 어디에도 친구 같은 분은 없다. 나도 점점 초조해져, "대체 누구와 만날 약속을 했다는 거예요"라고 화를 내었고, 차안에서 언쟁이 나버렸다.
그날 저녁, 어머니의 모습이 이상해졌다.
멍한 눈으로 소파에 주저앉아 무슨 말을 걸어도 "응.....응"이라고 밖에 하지 않는다. 일요일 저녁은 독일에 있는 동생 가족과 국제전화로 여동생과 손자 셋과 전화를 하게되어있어 어머니는 항상 그 시간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는, 전화 화상에 손자가 얼굴을 보여도 별로 반응이 없고, 저쪽에서 동생이 "엄마, 엄마"라고 말을 건네도 제대로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저편의 세계로 가버리다
동생은 비로소 사태를 분명히 인식한 것 같다. 통화 후에 "엄마는, 한계를 넘어 저편의 세계로 가신 것 같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다음 날, 어머니는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치매증상이 나타나는 것에는 주기가 있어 좋은 때와 나쁜 때가 있다. 이것이 최초의 경험이었다.

2014년 12월, 나는 하야부사 2의 발사 취재를 위해 다네가시마 섬에 가야했다. 사전에 어머니에게는 내가 다네가시마에 간다는 것을 여러 번 설명해 드렸다. 저녁 식사시간이 마침 다가와, 저녁식사 만은 식사 택배서비스를 예약해 두었다.
다네가시마 우주센터에서 발사 전의 취재를 위해, 센터를 돌아보고 있을 때였다.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너, 어디 갔니? 오늘은 몇 시에 오니?"
어머니의 기억은 내가 설명해 주기 전까지 뿐인가. 나는 섬뜩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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