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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 밥상 한 끼가 지구를 살린다

기사승인 : 2017-02-03 14:38 기자 : 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

‘생각하지 말고 먹어라’
사는 건 먹는 일이다.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라는 말이 웃자고 생긴 말이 아닌 게다. 둘 다 맞는 말이다. 먹는 일과 사는 일은 한 몸이니, 목적과 행위를 나누는 일이 무의미하다. 삶의 3대 기본 요소를 ‘의식주’라고 하는데, 순서가 틀렸다. ‘식의주’라고 불러야 한다. 옷 안 입어도 살 수 있고, 집 없어도 살 수 있다. 이 둘은 품위와 안정을 위한 것이지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다. 그러니 삶은 결국 식이다.
“그걸 누가 몰라?” 정말 그럴까? 다들 안다고 생각하지만, 너무 당연한 이 진리가 너무 당연해서 다들 잊고 사는 듯하다. 먹을 게 흔해서 그럴 게다. 시골 구석구석까지 24시간 편의점이 즐비하고, 컵라면이나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도 자연스럽다. 대형 마트에 가면 휘황찬란하게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먹거리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선택은 자유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우리에게 자유가 있는가? 자유가 있으려면 먼저 생각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먹거리’라고 포장된 제품을 구매하는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산업문명과 자본주의 체제가 구축해놓은 수탈 시스템의 교묘한 장치이기도 하다. ‘생각하지 말고 먹어라.’ 삶이 식이라는 걸 가장 잘 이해하고 이용하는 자들이 고안해 놓은 치밀한 수법이다. 바로 그 자들이 지금 이 세상을 지배한다. 그 자들은 ‘제품’ 속에 모든 것을 뒤섞어 넣어 정체를 알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고, 그런 다음에는 먹고사니즘의 늪 속에 빠뜨려 놓아 생각할 겨를이 없게 만들어 놓았다.

세 치 혀에 속지 말라
이제 우리가 먹고 마시는 먹거리의 정체를 알기 위해 여행을 시작해 보자. 여행의 출발점은 마트다. 마트에 진열된 수많은 먹거리 제품은 식품가공공장에서 온다. 흔히 ‘식품회사’라고 부르는 이곳은 ‘식품첨가물회사’라고 불러야 옳다. 600여 가지의 인공첨가물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원재료를 갈고 뭉개고 액화하여 전혀 다른 형태의 ‘공산품’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인공첨가물 중 400여 가지가 화학첨가물이고, 이 중 대부분이 석유 부산물이다. 산업문명은 곧 석유화학문명이고, 이것은 식품까지 지배한다. 물론 나머지 200여 가지의 천연첨가물이 안전한 것도 아니다.
원재료는 성분표시에 이름으로만 남을 뿐, 형체를 짐작할 수 없게 변신한다. 이러한 가공법의 발상지는 실험실이다. 흔히 가운을 입고 스포이드로 무언가를 빨아내어 비커에 집어넣고 흔들어가며 사뭇 심각하게 비커 속의 액체를 노려보는 그런 실험실 말이다. 수많은 첨가물이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되고(천연첨가물의 추출 및 정제 과정도 마찬가지다), 원재료의 어떤 성분과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연구가 끝나면 하나의 식품 가공 라인이 완성되는 것이다.
실험은 단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진행된다. 잘 팔릴 식품을 만들 것. 잘 팔리기 위해서는 모양도 그럴 듯해야 하고, 맛도 그럴 듯해야 하고, 포장도 근사해야 한다. 모양을 내려면 수십 가지의 첨가물이 필요하다. 변신이란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말이다. 맛을 내기 위해서는 의외로 몇 가지만 있으면 된다. 달콤짭짜름한 맛과 감칠맛만 있으면 거의 모든 가공식품을 완성할 수 있다. 미각은 놀라울 정도로 단세포적이다. 말조심을 하라는 뜻으로 세 치 혀를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하는데, 맛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세 치 혀를 너무 믿지 말라. 우리 몸 중 가장 몸을 잘 배신하고 유혹에 현혹되기 쉬운 게 혀다. 그 유혹은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경우도 많다. 혀는 절대 그것을 분별해내지 못한다. 거기에 인공향 몇 방울이면 맛을 느끼는 데 있어 중요한 후각까지 충족시키므로 먹거리의 기본 요소는 다 갖추게 된다.
여기서 완벽하게 배제되는 것은 소비자의 몸이다. 그 어떤 가공 과정도 소비자의 몸을 배려하지 않은 채 진행된다. 영양성분 표시가 우리에게 주는 정보는 아무것도 없다. 영양성분 표시는 식품첨가물 성분표시로 향하는 소비자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눈속임일 뿐이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쓴 마이클 폴란의 주장처럼 영양학은 오히려 현대인의 먹거리를 망쳐왔다. 영양은 화학 성분으로 쪼개져서 우리 몸에 흡수되지 않으며, 영양성분을 하나하나 알약으로 먹는다면 오히려 독이 된다. 그래서 음식은 통째로 먹어야 한다는 ‘홀푸드(whole food)’ 개념이 나오는 것이다. 홀푸드는 첨가물의 유해성을 설명할 때도 적용되는 중요한 개념이다.
MSG를 예로 들어 보자. ‘L-글루탐산나트륨’이라는 화학명을 가진 MSG는 사탕수수 등의 농작물에서 추출해내는 성분이다. 그래서 이것을 만들어 파는 기업에서는 천연에서 뽑아낸 아미노산일 뿐이니, 평생 먹어도 안전하다는 논리를 편다. 모유, 멸치, 다시마, 토마토 등에도 들어 있는 감칠맛이 MSG다. 그러나 통으로 먹는 것과 특정 성분을 추출해내어 먹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이렇게 추출해낸 성분은 유리된 형태(Free Glutamic Acid)로서 비타민, 미네랄, 섬유질, 아미노산 등과 결합된 복합체인 자연계의 MSG와는 다르게 작용한다. 복합체는 영양분이 되지만, 유리된 형태의 MSG는 혈액 속으로 흘러 들어가서 뇌세포 또는 신경세포를 공격한다. 가장 취약한 것이 신경세포(뉴런)인데, 신경세포를 과도하게 흥분시켜 파괴하기 때문에 신경과학자들은 MSG를 '흥분독소(Excitotoxin)'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인공조미료의 무해성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이 많은 것은 분자생물학의 한계 때문이다. 분자 구조만 따지는 분자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인공조미료의 MSG나 모유 속의 MSG나 같은 분자 구조를 가졌기 때문에 이렇게 먹으나 저렇게 먹으나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몸은 기계가 아니고, ‘1+1=2’라는 수학이 통하지 않는다. 알약이 식품을 대체할 수 없는 이유다.
분자생물학자들은 GMO(유전자조작생물체)도 똑같은 논리로 안전하다고 한다. DNA가 바뀌는데 분자 구조만 따진다는 건 정말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한심한 학문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다. 인도의 생명운동가인 반다나 시바는 이렇게 일갈했다. “박테리아 유전자를 씨앗에 집어넣고는 그걸 생명이라고 불러요. 그건 생명을 만든 게 아니라 생명을 오염시킨 겁니다.” 생명은 분자로 쪼갤 수가 없는 것이다.

들판은 오래 전에 해체되었다
이제 식품첨가물회사에 들어온 원재료를 따라 공장 밖으로 가 보자. 원재료는 어디서 오는가? 주로 들판에서 온다. 일부는 우리나라의 들판이고, 대부분은 다른 나라의 들판이다. 국제무역의 주요 품목은 곡물이다. 곡물은 식량이기 때문에 채소나 과일 같은 신선식품에 비해 월등한 지위를 누리므로 석유 다음으로 거래량이 많은 무역 품목이다. 70년대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가 이런 소리를 했다. “석유를 장악하라. 그러면 전 세계 국가를 장악할 것이다. 식량을 장악하라. 그러면 전 세계 인민을 장악할 것이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의 식량독점 정책은 GMO를 통해 가속화되었고, 각 나라와의 강압적인 FTA 체결로 전 세계를 식량식민지화 하는 데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GMO에 특허권을 부여할 수 있도록 강제함으로써 식량독점이 더 근본적인 종자독점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다행히 많은 나라들이 GMO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입과 재배 금지령을 내리고 있는데, 정부가 나서서 GMO를 이식시키기 위해 발악을 하는 한국은 기네스북에 등재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대부분의 요직에 앉아 있는 친미 매국 역적들을 들어내지 않고는 식민지 해방은 요원하다.     
물론 GMO가 생기기 이전에도 들판은 농민의 것이 아니었다. 농민이 땅을 소유하고 있어도 자신의 땅에서 자신이 원하는 작물을 마음대로 심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육종학이 발달하고 식품산업이 대두하면서부터 ‘들판은 해체되었고, 식품회사에 의해 재구성되었다’ 수십, 수백 가지의 작물이 식품첨가물회사에서 원하는, 가공이 용이하고 쓸모가 많은 몇몇 가지의 작물로 대체되면서 사라져갔다. 종자회사는 육종을 통해 재생 불량 종자(F1, 교잡종 1세대)를 만들어 팔았다. F1을 사서 심으면 다음해 거둔 F2를 심기가 힘들다. 흔히 파치라고 부르는 비상품들이 많이 나기 때문이다. 스스로 채종하여 씨앗을 되물림해 오던 주체적인 농민이 종자회사에 의존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한 지 오래다.
한 나라 안에서도 농업이 식품산업에 잡아먹히면 주객이 전도되는데, 이것이 군사적 힘을 등에 업고 협상을 강요하는 국제 관계에서는 더 극심하다. 농민이 씨앗과 들판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 온 국민이 식품산업의 노예로 전락한다. 영양학적으로 영양을 분석해낼 수 없는, 즉 인간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영양분을 가진 작물들이 그렇게 지구상에서 사라져 왔고, 그만큼 인간은 허약해져서, 온갖 오염에 취약하니 거대 의약마피아산업의 그물망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존재가 되었다.
이제 거꾸로 돌아가 보자. 산업문명 속에서 먹는 일이란 씨앗에서 시작되어 들판을 거쳐 식품첨가물회사를 통과해 우리 입으로 들어온다는 경로를 통틀어 생각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농업은 식품산업의 부속물이 되었음도 알게 되었다.

‘불편’이 편해질 때 비로소 자유롭다
이번에는 오염에 대해 생각해 보자. 씨앗은 F2의 불량률을 높이기 위해 건강하지 못한 교잡종으로 오염이 되고, 그것도 부족해 화학물질로 코팅이 되고, 작물은 제초제와 살충제로 수도 없이 샤워를 하고, 화학물질로 만든 각종 비료로 크기와 당도와 매끈한 모양만 발달시켜 정작 중요한 영양은 훼손되어 온 반면에 과도한 질소 성분 때문에 발암 가능성이 높아지고, 식품공장에 들어가서는 원래의 형체를 뺏긴 채 온갖 인공첨가물과 뒤섞여 그럴듯한 상품이 되어 나온다. 공장이 아니라 가정이나 식당으로 들어간 농산물은 어떤가? 여기서는 인공첨가물로 만들어진 조미료 세례를 피할 수 없다. 예전보다는 덜하다고는 하지만, 가정에서 소비하는 인공조미료 양도 만만치 않다. 마트에 진열된 다종다양한 가정용 조미료가 그것을 반증한다. 소비가 없으면 공급도 없으므로.
이러한 파쇼적 먹거리 시스템은 정치가 결정한다. 육종학이든 바이오공학(GMO 생산)이든 기업의 활동 범위를 정하는 일, 농약을 허용해주는 일, 첨가물의 종류와 허용치를 결정하는 일, 무역 품목을 정하는 일, 검역의 내용과 수준을 정하는 일 등등 모든 것은 법이 정한다. 이 모든 과정이 심각하게 오염된 것도 정치가 그리 정했기 때문이다. 우연이란 없다. 먹거리는 곧 정치이고, 이 오염된 먹거리 시스템의 연결 고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몹시 중요하다. 그러고 나면 먹는 일이 곧 사는 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건강한 음식을 먹는 일을 ‘자연주의’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이란 말을 끌어와서 쓰기 때문에 ‘자연주의’라는 말도 별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유기농업을 하는 농민도, 자연농업을 하는 농민도 음식을 가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밥 속에 들어가는 단무지와 맛살과 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신경 쓰지 않고,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이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지도 따지지 않는다. 요즘 6차 산업이라며 유행하는 팜파티에 올라오는 식단도 마찬가지다. 채소는 밭에서 바로 뜯어오면서 그 위에 뿌리는 드레싱을 비롯한 가공 양념을 쓰는 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 어부가 배에서 갓 잡은 고기를 회로 떠서 먹으면 그야말로 자연의 날것 그대로 먹는 거지만, 초장에 찍는 순간 그것은 자연이 아니다. 더 심한 경우는 건강한 먹거리를 위해 회의를 하는 생활협동조합 회의 테이블 위에도 자양강장제가 죽 놓여 있고, GMO 강의를 마친 뒤에 고깃집으로 몰려가서 GMO를 신나게 먹는다. 이 심각한 자기모순과 이율배반을 조금이라도 느끼면 그나마 다행인데, 거의 대부분 개의치 않는다.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불편해지니까.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 그렇게 따지고 살면 불편하지 않냐고. 전혀 불편하지 않다.오염된 시스템을 스스로 벗어나는 일이 어째서 불편한가? 먹는 일이 곧 사는 일인데, 기업과 정치가 사바사바 정한 시스템 속에서 주는 대로 받아먹는 일은 왜 안 불편한가? 그것이 사육장 속의 동물이나 뭐가 다른가? 많은 소비자들이 ‘편리’라는 말이 기업이 소비자의 건강을 생각해주는 말로 알아듣는다. 많은 국민들이 ‘정치가 정해놓은 기준치나 허용치들을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 어련히 알아서 정했겠지’라고 믿으려 한다. 심각한 착각이다. 기업은 단 한 순간도 소비자를 위하지 않고, 정치는 국민들 편이 아니다. 더구나 지금은 기업이 정치를 지배하는 코포라토크라시(corporatocracy) 시대다. 그 착각에서 깨어나는 순간이 자연주의의 출발점이 될 것이고, 그것이 습관이 되면 어느 순간 모든 불편은 사라진다. 그와 동시에 자유가 온다. 나는 자유롭다. 그래서 편하고 행복하다.

자연주의는 사랑이다
‘자연식’이라고 하지 않고 ‘자연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철학이기 때문이다. 먹는 일에서 시작한 자연주의가 더 근원적인 데까지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선 철학이 필요하다. 철학은 자신의 건강을 지키는 일에서 더 나아가 이웃의 건강과 인류의 미래까지 생각하게 하니까 말이다.
유기농업이나 자연농업을 하는 농민은 오체투지로 키워낸 자신의 농작물이나 가축이 온갖 화학첨가물과 GMO에 오염되어 자신의 입 속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어째서 끔찍하지 않을까? 윤리적 양심 때문에 채식을 선택한 사람들은 높은 지성을 가졌음이 틀림없는데도 어째서 자연주의자가 아닌가? 요리 유학을 갔다 온 젊은 요리사들이 ‘soil to table'나 ‘seed to table'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음에도 왜 철저하게 자연주의를 실천하지 못하는 걸까? 나는 이런 사실을 접할 때마다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자연주의는 씨앗에서 시작하는 것보다 식탁에서 시작하는 것이 더 옳다고 믿는다. 내 생활과 가장 밀접한 일에서 혁명을 이루지 않으면 전체를 아우르는 자연주의는 불가능하다.
몸이 자연이다. 내 몸을 구하면 지구를 구할 수 있다. 내 몸을 구하기 위해 자연주의 식생활을 실천하다 보면 수동적이고 맹목적으로 소비만 하는 존재에서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삶을 꾸리고 세상을 바꾸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구원을 먼 데서 찾지 말고, 큰 데서 찾지 말라. 자기 자신에서 찾으면 된다. 또한 자연주의 밥상 한 끼가 명상 백 번보다 낫다.
그러니까 무엇을 먹을 것이냐고? 다른 건 몰라도 먹거리만큼은 백 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농약과 비료가 있기 전으로, 석유화학이 생기기 이전으로, 인공첨가물과 육종 기술이 없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당연히 GMO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땅과 우리 몸에 가장 잘 맞는 토종 씨앗이 살아나고, 깨끗한 땅에서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자라는 농산물과 가축을 천연 발효양념으로 요리해 먹는 일이 자연스러운 시대로 말이다. 물론 모두가 귀촌을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생활협동조합을 이용하거나 직거래를 하거나 옥상텃밭, 도시텃밭을 일구는 것을 병행하면 된다. 먹거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인식이 절실하다.
불가능해 보이는가? 쿠바와 러시아는 나라 전체가 유기농만 재배하고 있으며, 덴마크는 최근에 앞으로 유기농만 허용한다고 선언했다. 이런 나라는 첨가물도 규제가 심할 수밖에 없다. 체제의 문제도 아니다. 세상사는 보이지 않는 어떤 특별한 질서나 법칙이 작동하는 게 아니라 그냥 사람이 결정하는 거다. 누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세상은 돌변할 수 있다. 그 ‘누구의 마음’을 바꾸는 게 소비자이자 국민의 역할이다.
소비를 철저히 정치적으로 할 것. 나의 구매 행위가 투표라는 것을 인식할 것. 나의 소비 행위가 오염되고 부정한 시스템의 연결 고리를 끊는 맨 처음 순서임을 한시도 잊지 말 것. 그 고리가 끊어지면 나머지는 도미노 작용으로 모두 끊어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혁명은 거기서 시작된다. 전체 국민의 10퍼센트만 철저한 자연주의자가 되어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자연주의는 만인을 위한 사랑이니까.

류외향 : 시인, 칼럼리스트. 제주도에서 자연주의 중식당 ‘마라도에서 온 자장면집’을 운영하며, 가게에서 GMO 강의도 꾸준히 열고, 여러 매체에 GMO와 자연주의 먹거리에 관한 글을 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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