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일송뉴스History

HOME > History

배계주 초대 울릉군수의 외증손녀 이유미 이사장

이유미 일송재단 이사장, 한의학 태두 일송 박성수 기념사업 이끌어

기사승인 : 2019-04-01 16:49 기자 : 김심철

일송재단과 배계주기념사업회를 이끌어 가는 이유미 이사장. 현대 한의학의 기초를 세운 일송 박성수는 그의 시아버지가 되고, 배계주 초대 울릉군수는 그에게 외증조부다. 이 이사장은 기념사업뿐 아니라 농식품업 경영, 북한 농산물 지원, 출판사업, 시인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열혈 커리어 우먼이다.

현대 한의학의 기초를 세운 일송 박성수(1897∼1989 현 경희대 한의대인 동양한의전문대와 조선무약 창업자)의 기념재단인 일송재단(一松財團)과 구한말 초대 울릉군수 배계주기념사업회를 이끌어 가는 이유미(李侑美 1960∼ )이사장은 기념사업분야의 열혈 커리어 우먼이다.

일송은 그의 시아버지가 되고 배계주 초대 울릉군수는 그에게 외증조부가 된다. 두 가문의 기념사업을 하면서 농식품업 경영, 북한 농산물 지원, 농업월간지 '상업농경영'과 한국 최초의 급식월간지인 ‘건강급식’을 발행하는 출판 사업, 또 시를 쓰는 시인으로 1인 3역 4역의 일정이 중년을 넘어선 그의 활동 시간표에 쉴 틈 없이 채워져 있다.

기념사업을 함께 하던 부군은 우리은행에 합병된 평화은행의 박태규 전 은행장으로 5년 전 타계했으나 그의 의욕과 발걸음은 더 견고하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두 기념재단을 통해 선대의 뜻을 기리면서 이 시대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연 친화적인 힐링 사업과 바른 먹거리 운동, 앞으로 평화롭고 즐거운 사회의 에너지가 되는 문화예술 분야의 다양한 사업도 준비하고 있는 이유미 이사장을 만났다.


-여러 사업을 하고 계신데 대표적인 직함은?

일송재단 이사장과 재단이 운영하는 국제농업개발원 원장, 농업경영과 식품과 건강분야 합본 월간지인 '상업농경영'과 '건강급식'의 발행인, 배계주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 일송 박성수 선생의 며느리이면서 구한말 배계주 초대 울릉군수의 외증손녀라는 집안 인맥관계로 보면 맡고 있는 기념사업이 선대 어른에 대한 후손의 보람과 도리로 볼 수도 있다. 일송은 한의학을 대학의 전공분야로 이끌어낸 저명한 현대 한의학자였고 우황청심환으로 유명한 조선무약의 창업자로 많은 일화를 남긴 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 지금의 경희대학교 한의대의 전신인 동양한의학전문대의 설립에 참여한 국내의 한의학 교수 2호로 알려진 분이다. 일제 강점기에 제약회사를 만들어 우리 민족의 건강은 우리 손으로 지킨다는 신념을 실현한 분이다.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비밀문서 연락활동을 하시다가 1년6개월 옥고도 치룬 분인데 창업하신 조선무약을 통해 궁중비방약을 일반 국민이 사용하게 한 것이 우황청심환이다. 초창기 한의사협회 회장도 하시고 충효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유도회 설립, 성균관관장과 성균관대 이사장, 서울의대 후원사업 등 많은 업적을 남기셨다.


-은행장을 역임한 부군이 일송 선생의 몇 째 아들인가?

남편(고 박태규 전 평화은행장)이 차남이다. 우리은행에 합병된 평화은행장을 역임하셨다, 그런데 고혈압, 중풍 등 가족력에서 못 벗어나신 탓인지 은퇴 뒤 아홉 번이나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자연치유나 대체의학에도 관심을 두게 되어 한 때 구당 김남수 선생의 침과 뜸치료를 배우고 중국에 가서 괄사요법이라는 대체의학도 공부했다. 8년간 중국 상하이에서 치유를 위한 요양생활을 했다.


-한의학자 집안인데 민간요법으로 볼 수 있는 대체의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구당 김남수 옹의 상해 뜸사랑 봉사단으로 함께 활동하던 구당의 제자 이은화 중의사와 함께

귀국하면서 우리 부부가 나름으로 오랜 투병생활에서 알게 된 치병의 첫걸음이 '약과 병원만 믿지 말자. 내가 만든 병은 내가 고친다'는, 이를테면 '자병자치'(自病自治)의 깨달음이었다. 그것을 슬로건으로 삼고 남편이 타계한 뒤부터 대체의학이 아니라 건강을 지키는 근본이 식품과 식생활에 있다는 점을 전파하며 사업을 시작했다.


-일송재단에서 하고 있는 사업을 구체적으로 소개해 달라.

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은 건강 계몽운동에 목적을 둔 정기간행물도 발행하지만 1974년부터 전문대 학력인증의 국제농업 교육기관인 신갈의 국제농업발원 운영, 1998년부터 29차례 북한에 곡물지원, 암과 당뇨치료용 기능성 농산물 생산기술 지원, 대학생 해외 봉사와 탐방활동 주관, 북한과 필리핀, 연해주 지역의 농기계와 종자지원 사업을 꾸준히 전개해 왔다.


-북한에도 지원 사업을 하고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나 지원했는가?

곡물은 지금까지 1만여 톤을 지원했고 채소를 비롯해 종자는 올해 2월에도 함경북도 회령 수해지역에 봄채소 종자로 17개 품종 5.6톤을 보냈다. 국제농업개발원은 바른 먹거리 문화선도, 세계 항노화센터 건설, 민족화합과 식량안보를 위한 연해주 개발을 3대 사업 지표로 삼고 있다.

-구한말 초대 울릉군수를 지낸 배계주 군수가 외증조부라면 집안의 역사적인 사연과 내력이 많을 것이다. 요약해서 소개해 달라.

국세청 조세박물관 상설전시중인 배계주 군수의 자료들(사진 왼쪽), 이유미 이사장은 2013년 울릉군수로부터 울릉군 명예군민증을 수여받았다.

외증조부의 부친으로 나에게 외고조부인 배현구 어른이 정3품 고위 관료였고 박영효 집안과도 가까운 관계였다. 그러나 세력가인 을사오적 이완용과의 불화로 아들인 외증조부 배계주 어른이 1895년 유배 형태로 울릉도 도감으로 부임하셨다. 그후 1900년 지방관제가 바뀌면서 울도군(지금의 울릉군) 군수로 다시 임명되었고 재임기간 중에 일본인들의 수산물 포획, 목재 도벌 등 수탈이 심해 일본까지 건너가 법적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는 역사적인 사건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한 때는 울릉도에 사는 일본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통제하는 군수를 감금 폭행하는 사고도 있었다. 특히 풍랑으로 육지를 오가는 선박의 조난 침몰 사고가 잦아 자금을 모아 큰 배를 마련했다는 기록 등 일화가 많다. 국사편찬위원을 역임한 이상태 박사의 연구논문을 통해 많은 비화가 공개되기도 했다.


- 언젠가 배계주 군수의 새로운 기록물이 발견되어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7년 전 이모님이 간직하고 있던 외증조부님의 인물 사진과 재임 당시 조정과 주고받은 각종 문서 유품을 공개해 뉴스거리가 되었다.


- 외가의 내력은 일찍 어머니와 외가 어른들을 통해 생생하게 접했을 텐데 외증조부 이후 외조부 때부터의 집안 이야기도 들려 달라.

외증조부 어른은 울릉군수에서 물러나 영종도를 거쳐 덕적도에 사시다가 돌아가셨고 그 분의 큰 아들인 나의 직계 외조부님(배준식)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항일 집안으로 몰려 도피생활과 같은 은둔생활을 하셨다. 외삼촌은 일제 의용군에 끌려가 돌아오지 않으셨다. 나의 어머니가 아들 노릇을 하시며 한 많은 생애를 함께 보내셨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공덕비가 있다는데 가보고 싶다는 말씀만 하셨지 울릉도에 가시지도 못하고 떠나셨다.


- 이제 자신의 성장기 얘기를 듣고 싶다.

나는 어머니만 생각하면 눈물이 함께 나오려 한다. 잘못한 게 많고 서운하게 해 드린 게 많아 참회와 그리움이 동시에 북받친다.


- 어머니의 속을 썩인 일이 많다는 얘기인가?

그런 셈이다. 어머니는 감리교 신학대를 졸업한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배계주 어른이 황해도 재령 분인데 기독교가 처음 상륙해 교회가 세워진 곳이 바로 황해도 해주였고 그곳에서 집안이 기독교인이 되셨으니 신앙심이 깊었다. 하지만 나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반항심리가 많아 어머니는 신앙을 강요하시지 않았지만 딸로 인해 불편한 일도 많이 겪으셨다. 어느 날 목사 한 분이 어머니에게 자기 자식도 교회에 안 보내는 사람이 무슨 신자냐고 큰 소리 치는 광경을 떨어진 거리에서 엿들은 적이 있다. 그때 어머니는 본인 스스로가 믿음을 선택하는 것이지 강요한다고 믿는 게 아니라고 응대 하신 걸 봤다.


-교회에 나가지 않은 뚜렷한 이유가 있었는가?  

우리 집에는 떠돌이 노인과 어린이며 갈 곳 없는 부랑자들이 수시로 찾아와 밥상 앞에 앉고 잠을 자기도 했다. 어머니의 실천 신앙과 불우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배려가 오히려 자식에게는 종교에 대한 경계감으로 작용한 것 같다. 자신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도 어머니의 신앙에 대한 저항 심리로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아버지도 마음이 따뜻한 분이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1.4후퇴 때 가족과 서울로 이주하신 뒤 아버지와 연애 결혼하셨다. 교직에 계셨던 아버지는 한때 춘천에도 계셨지만 서울 상명초교로 오셔서 교장으로 정년퇴직 하셨다. 마음씨 착한 선생님이셨다. 나는 춘천에서 초교 1학년을 마치고 서울 신림초교를 거쳐 강남여중,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숙명여대 가정관리학과를 다녔다. 문학소녀로 시인이나 작가를 꿈꾸던 시절도 있었지만 전공을 살려 한동안 나도 아버지의 대를 이어 한양여고에서 교직생활을 했다.


-지금 시인으로 시작활동을 하면서 시집도 낸 것으로 알고 있다.

첫 출판기념회에서 딸과 함께

시집을 두 권 냈고 그 중에 한글판과 함께 중국어판으로 첫시집을 중국에 e북으로 내기도 했다. 중학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하고 문학소녀의 끼가 나타나 시도 쓰고 작곡도 하고 콩쿨대회에 나가는 등 바쁘게 쏘다녔다. 그렇게 잘난 척하다가 어느 날 각성을 하는 시기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인데 내가 제대로 문학을 알지도 못하면서 시인이나 작가 행세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로부터 일체 대외적인 글을 쓰지 않고 절필했다.
시는 많은 것을 느끼고 겪은 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글이다. 어느 날 잠자리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침묵으로 병상에 옮겨진 남편 곁에서 혼자 독백을 하며 간병을 하다 보니 저절로 시가 나오더라.


-발행하는 간행물에 게재된 시를 보면 시인의 이름 '이유미' 앞에 '용선'(龍仙)이란 아호를 사용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작명된 호인가?

어머니가 나를 낳기 전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태몽을 꾸고 아들인 줄 알고 낳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내 얼굴이 어머니가 생전에 평생을 두고 못 잊어 하신 외증조부를 빼 닮아 비록 여자아이로 태어났으나 외증조부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룰 거라는 기대를 하셨다. 태몽으로 이름을 새로 만들어 쓰라는 말씀도 유언으로 남기셨다. 딸에 대한 깊은 애정과 기대를 걸고 사셨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그 이름을 만들어 쓰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을 더 행복하게 생각하며 살고 있다. 다시 태어나도 여자를 선택하겠다.


-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나 계획하고 있는 꿈이 있다면?

약산샘물로 2017년 유럽 식음료 국제 품평회 iTQi 한국업체 시상식에 초대된 이유미 이사장이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참석한 아스트리드 벨기에 공주와 자리를 함께 했다.

지난 8월부터 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에서 자연휴양림을 찾아 '약산 fun 힐링'이라는 건강체험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참가자들이 숲 속에 모여 우리가 생산하는 약산샘물을 마시며 심신의 건강을 회복하고 즐겁게 힐링하는 각종 자병자치(自病自治)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하는 행사다. 더불어 국민 건강을 위한 장독대 되살리기 등 바른 먹거리 캠페인을 쉬지 않고 펼쳐나가겠다. 물론 배계주, 박성수 두 어른과 관련된 자료를 집대성한 사료집을 펴내는 기념사업도 나에게 주어진 과제이고 사명으로 생각한다.

나는 즐거운 사회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하는 절대 동력이 식문화와 예술문화의 융성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내가 하는 사업이 예술이나 문화의 소재가 되는 창의적인 콘텐츠를 개발하고 시행하는 것도 준비하고 있다. 또 배계주 초대 울릉군수의 스토리를 영화로 만들자는 제의도 받은 적이 있어서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자료출처 : 김두호
인터뷰 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기자, 스포츠서울 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전무이사를 지냈으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역임

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  webmaster@iadi.or.kr

[저작권자ⓒ 국제농업개발원]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