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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과 웰다잉

기사승인 : 2019-04-06 13:29 기자 : 김심철

우리의 제례를 보면 顯考학생##신위라고 지방을 쓴다. 학생으로 배움을 위해 세상에 왔다가 되돌아갔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말이다. 잘 먹고 잘 살며 성공하기 위해 온 세상이 아니라 공부하러 왔다는 의미에서 보면 죽는다는 것은 이미 예비 되어진 학교의 졸업식과 같은 것이다.

혼비백산과 우리의 현실
넋을 잃는다는 의미의 혼비백산이란 단어는 정신인 혼이 놀라 달아나고 육체인 백은 흩어져버린다는 의미인데, 바른 죽음에 임하는 자세를 돌아볼 때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혼은 비물질계 존재로 인간이 육신을 가지고 있을 때 육신에 담겨있으면서 활동을 하는 것이다.

육체와 정신의 혼합체가 인간으로 삶과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는 이런 두 가지 혼과 백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살아가면서 인생의 목표의식이 없이 우왕좌왕 닥치는 대로 살다가 병을 얻어 몸에 칼을 대고 존엄이 사라진 죽음을 맞이하거나 치매에 걸려 살다가는 혼비백산의 상황이 점점 많아진다.

웰빙, 웰다잉이 어려운 세상
웰빙, 웰다잉이란 단어가 등장했지만 사랑타령을 하는 곳에 진정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듯이 잘 살고 잘 죽지 못하는 반어적 현실이 존재한다. 웰빙만큼이나 웰다잉이 어려운 것은 세상의 가치관의 변질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구 최후의 날이 오면 사람들은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는데, 다가오기 전에는 절실하게 느끼기 힘든 것이 바로 죽음으로 웰다잉도 지도사 자격증을 주고 산업이 되는 사회에서 진정한 웰다잉이 어떤 것인지는 점점 더 해답을 찾기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모던 타임즈’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
짧은 시간동안 산업사회의 발달은 인간의 산업사회의 부속품 정도로 만들어버렸다. 1936년 영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산업사회와 자본주의는 결국 모든 것이 이득을 위해 돌아가는 톱니바퀴로 만들어버렸고, 그 틀에서 빠져나온 후에는 무능하고 생존하기 어려운 나사일 뿐인 인간으로 전락해버리고 있다.

챨리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의 한 장면

존엄사. 임종체험, 안락사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의 경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삶을 더 진지하게 살아가는 기폭제가 된다고 한다. 임종체험으로 영정사진을 찍고 유언장을 작성하는 이벤트보다는 삶에 대한 가치관 정립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호스피스 서비스도 늘어나고 있다. 유품 정리, 디지털 유산상속, 사후를 위한 보험처럼 결국 웰다잉조차 산업으로 이어져나가는 모습은 웰다잉의 진정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임종체험

진정한 웰다잉이란?
더 이상 가족들과 살다가 사회공동체 속에서 자연스럽게 죽어가는 사회가 아니다. 치매와 몸놀림이 불편해지면서 요양원으로 보내지는 고령층이 늘고 있다. 공동체사회에서 격리되는 사회적 죽음이 먼저 시작되고, 육신의 죽음은 천천히 찾아오는 것이다. 치매환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도 웰다잉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장기기증의 빛과 그림자
나의 죽음이 누군가의 시작이라는 구호로 장기기증을 독려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를 원하는 수요보다 적은 장기제공으로 장기밀매, 살인이 행해지고 뇌사자 판명의 오류는 오히려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 한국장기기증원에 따르면 140여만 명이 사후 장기기증을 서약했다고 하는데, 장기기증과 장기이식으로 삶을 연장하는 것이 과연 웰다잉과 웰빙이 될 수 있는 가를 고민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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